『반일종족주의』독자 여러분에 드리는 말씀 - 이영훈 교수

사회디자인연구소 승인 2019.08.16 16:16 | 최종 수정 2019.08.16 16:28 의견 0


글 이영훈 (이승만학당 교장. 전 서울대 경제학부 교수)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지난 7월 초 저와 동료 연구자 5명은 『반일종족주의』라는 책을 출간하였습니다. 오늘날 한국의 민족주의는 차라리 종족주의라고 함이 더 적합할 만큼 건강한 애국심을 결여한 가운데, 대외인식이 불균형적이고, 역사인식이 비과학적이고 무조건적 반일 적대 감정에 사로잡혀 있음을 지적한 내용이었습니다. 책이 출간된 이래 지금까지 한 달 보름 동안 크고 작은 논란이 끊이지 않았습니다. 많은 기자가 대표 저자인 저에게 질문을 던졌습니다.

 그에 대해 여러 차례에 답변을 드렸습니다만, 계속해서 같은 질문이 반복되고 있기에 이 자리를 빌어 가장 빈번하게 던져진 대표적인 질문 두 가지에 대해 공개적으로 설명드리도록 하겠습니다.

 가장 많이 던지는 질문은 왜 일제의 식민지 지배가 지닌 수탈성을 부정하느냐, 그 정치적 의도가 무엇이냐 하는 것입니다. 실은 이 같은 질문은 저에게 평생에 걸쳐 수도 없어 던져진 것입니다. 일제가 조선을 병합하고 지배한 것은 장차 조선을 영구히 일본 영토의 일환으로 편입하고 동화시킬 목적에서였습니다. 이 같은 지배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총독부는 일본의 법과 제도와 기구를 조선에 이식하였습니다. 그래야 조선을 영구히 동화시킬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식된 법, 제도, 기구를 토대로 하여 조선에 대한 일본의 투자가 이루어졌습니다. 처음에는 재정투융자가 중심이었으나 1930년대 이후가 되면 민간자본이 투자의 중심을 이루었습니다. 그에 따라 식민지 조선에서는 자본주의 또는 시장경제체제가 발달하였습니다. 조선과 일본은 하나의 단일 시장으로 완벽하게 통합되었습니다. 점점 많은 투자가 이루어져 조선의 농지를 개간하고, 조선의 광산을 개발하고, 각 산업의 공장을 세웠습니다. 이를 위해 철도, 도로, 항만, 체신 등의 사회간접자본도 활발하게 건설되었습니다. 그 결과 점점 많은 수의 조선인이 일본인 농장주의 소작농으로, 일본인 광산주의 광부로, 일본인 공장주의 임금노동자로 포섭되어 지배되었습니다.

 이상이 그동안 저와 동료 연구자들이 세밀한 연구를 실증적으로 통해 밝혀온 바입니다. 세간에서는 이를 두고 식민지근대화론이라 하면서 저희들을 비판해 왔습니다. 그런데 저는 지난 2007년에 출간한 『대한민국이야기』 라는 책에서 그 비판에 대해 다음과 같이 대답한 바가 있습니다.

 “그런데 그런 식의 경제성장이 계속되면 결국 어떻게 됩니까. 조선의 토지와 자원과 공업시설은 점점 일본인의 소유가 되지요. 바로 그것이 진정한 의미의 식민지적 수탈이지요. 빼앗아 간 것이 아니라 투자를 하여 한반도의 토지와 자원과 여러 시설을 일본인의 소유로 만들어 가는 것입니다. 그 점에서 동화정책에 따른 실질적인 수탈의 무서운 결과를 보게 됩니다. 이 점을 명확히 할 필요가 있습니다. 식민지근대화론 이라 하면 사람들은 일제의 조선 지배를 미화한다고 여기고 있습니다만 천만의 말씀입니다. 진정한 의미의 수탈과 차별이 어떠한 메커니즘을 통해 벌어졌는지를 제대로 보자는 것이 식민지근대화론이지요.”

 그리고선 다음과 같이 이야기하였습니다. “그런데 식민지근대화론은 이러한 일본제국주의에 대한 비판에만 머물지 않습니다. 제국주의의 지배가 법과 제도와 시장을 통한 것인 만큼 그것은 새로운 인간과 사회원리의 새로운 문명이 이식되어 전통과 충돌하고 접합하면서 나름의 형태로 정착하는 과정이기도 했습니다. 그 점을 동시에 보자는 것이 식민지근대화론입니다. 왜 그렇게 해야 합니까. 바로 그 과정에서 조선인 자신이 스스로 변하고 있었기 때문이지요. 그들은 시대의 변화에 적극적으로 대응하면서 자신을 근대인으로 개발하고 있었습니다. 식민지의 경제 규모가 커지는 과정에서 일본인과의 차이가 벌어지고 있었습니다만 조선인의 소득도 커지고 있었지요. 원래 그런 그럴만한 문명 능력의 전통문화였습니다. 그 점을 함부로 과소평가해서는 곤란합니다.”

 이상과 같이 저는 일본의 식민지 지배의 수탈성을 부정하거나 지배의 정당성을 주장하지 않습니다. 그런 취지의 발언을 하거나 글을 쓴 적은 없습니다. 수탈의 체제적 원리와 구조적 양상을 총체로 보자는 취지였습니다. 원래 수탈이란 말에는 개발이란 뜻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영어로 exploitation 하면 착취한다는 뜻도 있지만 개발한다, 활용한다는 뜻도 동시에 포함되어 있습니다. 일제의 지배는 어디까지나 수탈이지만, 동전의 앞뒤 양면과 같은 관계로 개발의 효과를 담고 있으며, 바로 그 과정에서 전통 조선인은 근대 한국인으로 변모해 왔던 겁니다.

 지금까지 제가 비판해 온 것은, 그리고 우리 공동저자 6명이 『반일종족주의』란 책을 통해서 지적한 것은 기존의 역사 교과서, 교양서, 소설, 영화 등등이 오로지 일제의 야만적 약탈성만 강조, 부각해 왔다는 점입니다. 아무런 대가도 지불하지 않고 총칼을 앞세워 토지와 식량과 노동력과 여성의 성을 약탈하고 약취했다는 것 아닙니까. 지난 60년간 역사 교과서의 식민지기에 관한 서술이 기본적으로 이러한 약탈설에 기초하였음은 아무래도 부정하기는 힘듭니다. 조금씩 개선되어 오기는 했습니다만, 지금도 그러한 서술의 기저에서는 본질적인 개선이 없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약탈설은 사실이 아닙니다. 저희 공저자들은 그 점을 비판하였으며, 책을 구입한 적지 않은 여러분이 그 점에서 큰 충격을 받았다고 고백하고 계십니다.

 약탈설의 더욱 큰 문제는 수탈의 다른 한 측면인 개발, 곧 일제의 억압과 차별에도 불구하고 우리 한국인이 근대인으로 자기를 변모해 온 역사를 놓치거나 왜곡한다는 점입니다. 우리 한국인과 한국사회는 언제부터 근대인과 근대사회로 변모하였는가라는 문제의식은 역사 교과서에서 송두리째 발거되어 있는 실정입니다. 오로지 일제에 무장으로 저항한 독립운동의 역사만이 그 시대의 역사라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그것이 중요한 역사인 것은 사실입니다만, 대다수 한국인이 근대 교육제를 통해, 근대 관료제를 통해, 근대 사법제를 통해, 근대 시장제를 통해 스스로를 근대인으로 개발시켜온 역사 역시 그에 못지않게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왜 그러합니까. 바로 그러한 문명사적 전환을 바탕으로 해서 이후 대한민국이란 근대 국민국가가 세워졌기 때문입니다.

 해방 이후 북한의 공산주의자들은 그 모든 것을 일제가 지배의 목적으로 부식한 것이라 하여 파괴하거나 해체해 버렸습니다. 그렇지만 우리 대한민국의 건국세력을 그것을 계승, 발전시켰습니다. 이미 우리가 주도적으로 계승하고, 우리 실정에 맞게 변용한 이상, 그것은 더이상 일제가 남겨준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세계사적으로 보아 근대 서유럽에서 발생한 근대문명이었습니다. 지난 70년간 대한민국이 세계의 여러 후진국이 부러워하는 큰 성취를 이룬 것은 바로 이같이 우리의 의지와 선택으로 근대문명을 수용, 계승, 변용, 발전시켰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우리의 주장을 두고 이른바 좌파 세력은 일제의 식민지 지배를 미화한다고 매도하고 있습니다만, 저는 반일 종족주의의 천박한 공세에 불과하다고 생각합니다. 그 모든 것을 때려 부순 북한이 이후 어떻게 되었습니까. 조선왕조의 국가적 노예제나 국가적 농노제로 회귀해 버린 것은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역사의 진실이라고 생각합니다.

 다음, 저에게 빈번히 던져진 두 번째 질문은 다음과 같습니다. “당신은 2004년 MBC심야토론에 나가 일본군 위안부를 공창이라 했으며, 그로 인해 큰 소란이 일자 사과 성명을 발표하고 그 분들을 찾아가 사과까지 하지 않았으냐. 그때 발표한 성명서를 보면 일본군 위안부를 성노예라고 하지 않았느냐. 그런데 왜 지금 와서 그때와 다른 주장을 하느냐”하는 겁니다. 며칠 전 JTBC에서도 그런 취지로 저를 비판한 걸로 알고 있습니다. 2004년 그 사건의 경과에 대해 지금 여기서 제가 설명하는 것은 시간 낭비인 것 같습니다. 저는 그에 관해서 조금도 숨길 것이 없이 당시의 경과를 2007년 『대한민국이야기』이란 책에서 설명하였습니다. 그 책에 저는 “일본군 위안부 문제의 실체,” “그날 나는 왜 그렇게 말하였던가”라는 두 개의 장을 베풀어 일본군 위안부 문제에 관한 저의 이해와 입장을 서술하였습니다. 그러면서 위안부 문제의 연구를 주도해 온 일본의 요시미 요시아키라는 분의 학설을 채택하여 일본군 위안부제는 일본군의 전쟁범죄이며, 위안부는 일본군의 성노예였다고 정의했습니다.

 당시 큰 소란이 일었던 것은 정부가 주도하는 친일반민족행위 청산의 방식에 문제가 있다는 저의 주장을 둘러싸고 토론석상에서 오해가 발생하였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서 위안부 그 자체에 대해서는 저는 제 독자의 주장을 펼칠 연구성과를 보유한 상태가 아니었습니다. 이후 3년 뒤 『대한민국이야기』라는 책을 출간하면서도 그러한 상태는 마찬가지였으며, 이에 위안부 문제에 관해 국내외 통설을 대변하는 학설을 채택하여 위안부 문제의 역사적 성격에 관한 저의 입장을 정리하였던 것입니다.

 이후 세월이 12년이나 흘렀습니다. 저는 기회가 닿은 대로 위안부에 관한 국내외 연구성과를 읽어 나갔습니다. 그 사이 전쟁말기에 일본 군인이나 노무자로 다녀온 50여 명과 인터뷰를 하였으며, 그 과정에서 위안부에 관한 그들의 기억을 청취하기도 했습니다. 저의 주요한 연구 과제인 조선시대의 노비제에 관한 연구를 추진하다가 기생제의 실태와 본질에 대해 알게 되었습니다. 그리고선 기생제야말로 군 위안부제의 역사적 원류이구나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또한 한국학중앙연구원의 고문서조사팀과 더불어 고문서를 탐색하다가 1943-44년 동남아의 버마와 싱가포르에서 일본군 위안소의 조바(일본어), 곧 관리인으로 근무한 사람의 일기를 발굴하여 번역, 출간하기도 했습니다. 위안소제 또는 위안부제와 관련하여 그런 수준의 1차 사료가 발굴된 것은 일본에서도 없던 일입니다. 저는 그 일기를 통해 위안소의 여인들이 폐업의 권리를 보유했다는 매우 놀라운 사실을 확인하였습니다. 이후 잘 알려진 원 위안부 문옥주 씨의 회고록을 읽으면서도 그 점을 확인하였습니다. 2017년 대학에서 정년한 뒤 저는 일본에서 이루어진 근대 공창제 및 위안소제에 관한 주요 연구성과를 모두 입수하여 세밀하게 검토하기 시작했습니다. 그 결과 일본군 위안부제는 근대 일본이 운용한 공창제의 일환이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와 별도로 저에게 결정적으로 영향을 미친 것은 1964-67년에 작성된 서울대학교 보건대학원 학생들의 민간위안부와 미군위안부의 생활실태에 관한 석사학위 논문들이었습니다. 이 논문들은 그야말로 황금과도 같은 귀중한 학술적 가치를 갖고 있습니다만, 그간 어느 연구자도 그에 주목하지 않았습니다. 이들 논문과 더불어 대한민국정부가 매년 작성한 <보건사회통계연보>를 검토한 결과 저는 해방 후에도 위안부제가 존속했음을 확인하게 되었습니다. 다시 말해 일본군 위안부 제도는 1937-45년 만의 일이 아니며, 해방 후 민간위안부, 한국군위안부, 미군위안부의 형태로 일제하에서보다 훨씬 많은 여인들이 위안부로 존속했으며, 그들의 위생상태, 건강상태, 소득수준, 포주와의 관계 등은 공권력의 보호를 받지 못하는 가운데 일본군 위안부들보다 훨씬 참혹하였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이 사실은 저로 하여금 일본군 위안부 문제를 15세기까지 거슬러 올라가 국가에 의한, 지배신분에 의한, 가부장에 의한, 남성에 의한 여성의 성에 대한 약취의 역사를 전면적으로 재정리하는 가운데 그 역사적 위상을 올바로 재정립할 필요가 있다는 연구과제를 절감하게 해 주었습니다. 그래서 우선 일차로 이번에 출간한 『반일종족주의』 란 책 제3부에 실린 3편의 논문을 작성하게 된 것입니다.

 연구자에게 “당신 왜 변했어”라고 묻는 것은 옳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평생 15-19세기 조선왕조시대의 경제사를 연구해 왔습니다만, 읽는 사료의 폭이 깊고 넓을수록 조선시대에 관한 저의 생각이 해마다 바뀌어 가는 것을 절감하고 있습니다. 세월과 함께, 다시 말해 사료의 발굴과 천착과 더불어 연구자는 변화해 갑니다. 변화하지 않은 연구자는 진정한 의미의 연구자가 아닐지도 모릅니다. 다만 변하는 과정을 세밀하게 기록하고 밝힐 필요가 있습니다. 그것을 숨겨서는 곤란합니다. 남에게 혼란을 주기 때문입니다. 무슨 정치적 의도가 있는가라는 오해도 받을 수 있습니다. 저는 이번 책에서 제가 변하게 된 사정을 자세하게 설명하였습니다. 예전에는 요시미 교수의 성노예설을 채택하였는데, 이제 보니 문제가 많다, 일본군 위안부는 기본적으로 폐업의 권리와 자유를 보유하였다, 그런 이유에서 성노예로 규정될 수 없다. 요시미의 학설은 틀린 것 같다는 저의 새로운 입장을 분명히 밝혔습니다.

 아마 위안부 성노예설을 국내에서 공개적으로 부정한 연구자는 제가 최초가 아닌가 생각합니다. 위안부가 관헌에 의해 강제로 끌려가거나 납치되었다는 종래의 통념을 부정하거나 수정하는 데는 세종대학교의 박유하 교수라는 분이 큰 역할을 하였습니다. 바로 그 주장 때문에 명예훼손의 혐의로 재판까지 받고 있는 실정입니다. 박유하 교수가 재판부에 제출한 방대한 자료를 검토하면 위안부를 관헌이 강제로 끌고 갔다는 통념은 일본에서는 부정된 지는 이미 오래고, 국내에서도 더 이상 그렇게 강하게 주장하는 연구자가 없어진 실정임을 알 수가 있습니다. 저는 박유하 교수의 뒤를 이어 위안부=성노예설을 부정한 최초의 연구자가 된 셈입니다. 이 두 새로운 학설과 주장으로 일본군 위안부 문제에 관한 재검토는 거의 불가피해졌다고 생각합니다. 저를 여기까지 이끌어온 것은 오로지 사료에 충실하여 역사의 실태를 있은 그대로 밝힌다는 연구자의 기본자세, 그것 이상도 이하도 아닙니다. 저에게 가장 빈번하게 던져진 두 번째 질문에 대한 저의 대답과 이상과 같습니다. 『반일종족주의』 제3부를 읽으시면서 저의 답변이 얼마나 진솔한 것인지, 혹 어떤 위선이나 모순을 품고 있지나 않은지 검토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마지막으로 책이 출간된 이후 공영방송과의 관계에서 있었던 별로 아름답지 못한 사건에 대해 해명하겠습니다. 책이 출간된 지 이제 고작 한달 보름입니다. 그간 관련 학계나 연구단체나 운동단체로부터의 공식적인 반응이나 개별 연구자의 비평이 제출된 적은 없습니다. 그렇지만 머지않아 큰 논쟁이 벌어질 수밖에 없다고 생각합니다. 저희들의 주장을 방치한 채, 기존의 역사교육을 그대로 이어갈 수는 없으며, 기존의 위안부운동을 계속해 갈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벌써 여러 연구자와 연구단체가 저희들의 책을 비판하기 위한 학술적 대응을 시작했다는 소식을 듣고 있습니다. 이는 매우 고무적인 현상이라고 생각합니다. 저희들도 책이 출간된 이후 한국사 연구자들과 정의기억연대(구 정대협)에 대해 여러 차례 공개토론의 필요성을 상기하고 촉구한 바가 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신문과 방송이 할 일은 명백하다고 생각합니다. 학계나 관련 단체의 동향을 취재하여 보도하거나, 또는 관련 연구자를 초청하여 찬반 공개토론회를 개최하여 이를 전 국민에게 공정하게 보도하는 것입니다. 저는 언론이 직접 찬반 비평의 당사자로 나서서 자신의 의견을 강하게 주장하는 것은 옳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언론에 종사하는 분들이 학술적으로 또는 정치적으로 매우 복잡하고 미묘한 문제를 전문적으로 다룰 만큼의 훈련을 받거나 관련 연구성과를 축적한 상태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난 7월 22일 MBC는 스트레이트라는 프로그램을 통해서 우리의 책 『반일종족주의』를 두고 “친일파세력이 만든 책이라고, 해방 후 친일파를 완전히 청산하지 못하여 이런 책이 나온다”는 취지로 비난을 하였습니다. 게스트로 초대된 어느 사람은 아직 책을 읽어보지 못했지만 책의 그러한 성격은 분명하다고 단언했습니다. 그렇게 우리의 책을 방송을 통해 극구 비난한 MBC는 이후 이메일과 핸드폰 문자를 통해 인터뷰를 집요하게 요청해 왔습니다. 인터뷰의 취지나 질문의 내용을 정중하게 밝힌 공문서를 보내온 적은 없습니다. 심지어 우리 공동집필자의 특정인이 특정 장소에 특정 시각에 나오는 줄 알고 길거리에서 기다렸다가 인터뷰를 강요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다가 지난 8월 4일 일요일 아침 저의 아파트 부근에서 이미 잘 알려진 사고가 발생하였습니다. 저는 밀린 일을 처리하기 위해 간편복 차림으로 아파트 앞을 나서다가 대기 중인 MBC기자로부터 인터뷰 요청을 받았습니다. 저는 거절했습니다만, 기자는 계속 마이크를 들이대며 저를 따라왔습니다. 저는 뒤늦게 카메라기자가 저를 촬영하고 있다는 사실을 인지하였습니다. 카메라를 치우라고 강하게 요구했습니다만, 묵묵부답이었습니다. 저의 사생활과 인격권과 초상권이 노골적으로 무시되는 그 장면에서 저는 분노를 폭발했으며, 기자의 마이크를 후리치고 나아가 그의 뺨을 때렸습니다.

 돌이켜 보면 제가 기자의 뺨을 때린 것은 제가 좀 더 원숙한 인격이었다면 피할 수 있는, 불미스런 일이었습니다. 개인적으론 그 기자에게 사과의 말씀을 전하고자 합니다. 그렇지만 다시 돌이켜 보면 상대방의 동의를 받지 않고 마이크를 계속 들이대거나 심지어 촬영까지 하는 사실 역시 결코 정당화될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것 역시 하나의 불법이요 폭력이기는 마찬가지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저의 사생활과 인격권과 초상권을 노골적으로 무시하는 처사에 최소한의 정당방위를 했다고 생각합니다.

 제가 이미 2주나 지난 이 사건을 재론하는 것은 방송사가 지켜야 할 올바른 취재활동의 자세와 보도의 공정한 기준에 관해 다시 한 번 국민여러분의 여론을 환기하기 위해서입니다. 우리 공동저자들이 오랜 기간 연구를 해 온 결과로 출간한, 나름의 확신과 용기가 없이는 쉽게 출간할 수 없는 따지고 보면 고도 수준의 학술서에 대해, 그리고 관련 학계가 아직 어떤 반응도 내지 않은 동중정의 상황에서, 이 문제에 관해 전문적 식견을 보유하지 않은 방송사의 PD와 기자들이 함부로 자신의 선입견을 국민의 여론인양 포장하여 극렬하게 비방할 수 있는가, 그럴 자격이 있는가라는 점입니다. 그 점을 마지막으로 환기하면서, 그동안 저희들의 책을 읽고 적극 동감하고 지지해 주신 수많은 독자 여러분에 감사의 뜻을 표하고자 합니다. 감사합니다.

2019년 8월 16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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