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유럽통합과 통화, 재정위기 (4) (정대영)

김대호(사회디자인연구소장) 승인 2013.07.17 17:51 의견 0

-위기의 시작, 확산, 교훈-

  제3장 유럽통합과 통화, 재정위기 위기의 시작   1992년9월16일 수요일(블랙 웬즈데이)에 터진 유럽통화위기는 한국에는 별로 알려지지 않았고 현재는 기억하는 사람이 거의 없는 사건이지만 국제금융계에 큰 의미가 있었던 사건이다.   첫째, 1997년IMF사태를 전후하여 한국에도 널리 알려진 조지소로스가 평범한 헷지펀드 운영자에서 국제금융계의 거물로 등장하는 계기가 되었다.둘째,국제기축통화의 지위를 조금은 갖고 있던 영국파운드화가 신뢰를 잃고 완전히 퇴조하는 계기가 되었다.셋째,초기에는 유럽경제통화동맹(EMU)의 시련으로 작용하였지만 결국 단일통화도입 등EMU를 더 단단하게 만드는 사건이었다.넷째,유럽통화위기는 경제기초여건이 그렇게 나쁘지 않은 선진국에서 발생한 외환위기의 새로운 형태로 경제기초여건이 아주 나쁘지 않아도 시장참가자(투기세력)의 자기실현적 기대(투기)에 의해서도 외환위기가 발생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 사건이다.   통화위기(currency crisis)는 외환위기(foreign exchange crisis)의 다른 표현이다.외환위기는 경제기초여건 악화,국제적 신용경색,시장참가자의 급격한 행태변화 등으로 환율급등과 고정환율제의 붕괴,그리고 나아가서는 외환보유고의 고갈,대외채무 지급불능상태를 초래한다.외환위기는 선진국보다 중남미국가 등 개발도상국에서 주로 발생했다.그러나1992년 유럽통화위기는 뉴욕과 함께 국제금융시장의 양 대축의 하나인 영국 런던에서 촉발되어 유럽전역으로 확산되었다.   1992년9월16일 런던 금융중심지 시티에서도 심장격인 영국의 중앙은행(영란은행; Bank of England)에서 과거에도 없었고,앞으로도 발생할 가능성이 거의 없는 사건이 일어났다. 9월16일 오전 영란은행은 두 차례 금리를 인상했다.먼저 기준금리(minimum lending rate)를10%에서12%로 올렸으나 시장이 실망하자 조금 후12%에서15%로 인상했다.이것만이 그날 사건의 전부는 아니었다.두 차례의 금리인상에도 불구하고 시장에서 파운드화에 대한 투매가 계속되자,오후에 기준금리를15%에서10%로 다시 내리고(원위치 하고)유럽환율조정메카니즘(ERM)을 탈퇴하여 변동환율제로 복귀하였다.   중앙은행이 하루에 두 번 각각2%p, 3%p올리고 그 날 다시5%p내리는 치욕적인 사건은 앞으로 다시 발생하기 어려울 것 같다.금융시장의 금언 중에 하나가“중앙은행에 맞서지 마라”이다.이 날 사건은 중앙은행의 참패로 투기세력도 중앙은행을 이길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줬다.   당시EC주요국은 회원국간 통화가치 안정을 위해 각국의 환율이 일정 범위내로 움직이도록 하는 유럽환율조정 메카니즘(ERM)을1979년3월 도입하여 운영하고 있었다.영국은1990년10월ERM에 가입하였으나 성장둔화 실업 증가 등과 함께 독일과의 정책공조의 어려움으로1992년 하반기부터 환율유지 가능성에 대해 의문이 커지게 되었다.   독일은 통독이후의 물가상승,재정적자 누증,통화팽창 등에 대응하여1991년 초부터 고금리정책을 추구하여 왔다.다른ERM가입국들도 경제상황이 안 좋아도 환율 유지를 위해서 고금리정책을 쓸 수밖에 없었다.특히 경기침체,고실업 등 경제기초여건이 취약한 영국,이태리,스페인,포르투갈 등의 어려움이 더욱 컸다.이에 대해 독일은 영국 등 일부 회원국의 환율재조정을 요구하였으나,이들 국가는 평가절하의 악순환을 우려하여 반대로 독일의 금리인하를 주장하여 해결 가능성이 거의 없었다.   이러한 거시경제의 불균형,정책부조화의 틈을 투기세력이 비집고 들어온 것이다.헷지펀드의 운영자인 조지소로스는 차입에 의한 영국파운드 매각,독일마르크 매입방식으로 파운드화를 집요하게 공격하였다.조지소로스는 갖고 있는 채권 등의 담보를 이용 런던 등 금융시장에서 영국파운드화를 빌리고 이 돈으로 독일마르크화를 매입하여 은행에 예치한다.매입한 독일마르크화 예금을 담보로 다시 파운드화를 차입하고 차입한 파운드화로 독일마르크화를 매입하는 방식을 계속하는 것이다. 이렇게 하면 종자돈(최초 담보금액)의20배 이상의 파운드화를 차입하여 마르크화를 매입할 수 있다.파운드 차입금리가1개월기준1%정도이고1개월 이내에 파운드화가5%절하(마르크화 절상)되면4%이상의 수익을 단기간에 올릴 수 있다.즉1억 파운드의 종자돈으로 몇 주만에1억 파운드(100%)이상의 순수익을 낼 수 있다.   이러한 파운드화 공격방식으로 조지소로스는 당시 수억 달러(어떤 사람은 수십억 달러로 추정)이상을 벌었으며 국제금융계의 거물로 등장하였다.헷지펀드의 운영자가 세계 중앙은행의 원조인 영란은행에게 비참한 패배를 안겨 주었다.다행히 영란은행은 중앙은행의 원조이긴 하나 모범적인 중앙은행은 아니었기 때문에 중앙은행 사람으로서 덜 창피한 일이었다.세계에서 모범적인 중앙은행을 꼽으라면 독일중앙은행인 분데스방크,미국중앙은행인Fed라고 생각된다.   영국은 이 때ERM에서 탈퇴한 이후 복귀하지 않아EU회원국이긴 하나 단일통화 등 경제통화동맹 등에 소극적인 입장을 지속하게 되었다.투기세력의 공격은 영국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고1992년9월16일 이전에 이미 경제기초여건이 취약한 스페인,포르투갈,이태리,아일랜드,스웨덴 등 유럽 여러 나라에 확산되고 있었다.유럽전역은 투기장화 되고 유럽통화위기가 본격화되었다.   위기의 확산 투기세력의 공격은 유럽 여러 나라에서 이루어졌고1992년9월16일 투기세력이 영국에서 승리함으로써 경제기초여건이 양호하고 정책신뢰도가 높은 독일과 네덜란드 등을 제외하고 전 유럽이 투기장화 되었다.조지소로스의 파운드화 공격방식은 자금이 많이 필요 없고 어렵지 않기 때문에 많은 투기세력이 유사한 방식으로 나름 이유를 만들어 유럽 여러 나라 통화를 공격하였다.   이태리의 리라화는 시장의 압력을 이기지 못하고 영국 파운드화에 이어 유럽환율조정메카니즘(ERM)을 탈퇴하였다.스페인 페세타화는5%평가절하한 상태로ERM체제에 잔류할 수 있었다.아일랜드는 당시 경제기초여건이 양호한 상태이었으나 영국과의 교역관계가 많았기 때문에 영국의 파운드화 가치가 크게 떨어져 경쟁력 유지가 어려울 것이라는 시장의 기대 때문에 공격대상이 되었다.포르투갈도 당시에 큰 문제가 없었으나 스페인의 평가절하와 맞물려 투기세력이 공격하였다.   스페인,아일랜드,포르투갈 등은 투기세력의 공격이 심해지자 중앙은행의 시장개입으로는 한계가 있어 자본거래에 대한 규제 강화정책을 채택하였다.외국 투기세력이 자국통화의 차입 후 매각하는 방식으로 공격(조지소로스방식)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금융기관이 비거주자(외국인)에 대출하는 경우 동일 금액을 중앙은행에 무이자로 예치토록 하는 강력한 조치를 취하였다.이어 비거주자에게는 자국통화의 스왑거래도 금지하였다.이러한 정책은 외환자유화를 실시한 선진국에서 정책기조를 한참 뒤로 돌리는 것으로서 시장의 신뢰를 잃는 것이지만 투기세력의 공격이 워낙 강했기 때문에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이와 같은 자본규제 말고도 앞으로 다시 시행되기 어려울 것 같은 충격적인 조치도 있었다.당시에는 인터넷이 없었기 때문에 국제금융속보는 통상 로이터 통신사에서 보내주는 텔렉스(두루말이 용지에 인쇄되는 것)로 확인하였다. 9월16일쯤 필자가 아침에 출근(당시 브뤼셀 근무)하여 텔렉스를 확인하는데 스웨덴 중앙은행이 은행에 대한 한계대출금리(marginal lending rate)를500%로 인상한다는 기사가 있었다.처음에 필자는 외환시장이 비정상적으로 되니 로이터 기자들도 이상해져 오보를 보내는구나 생각했다.개명천지에 선진국에서 금리가500%라니 중앙은행이 대부업체도 아니고 도저히 믿을 수 없었다.바로 벨기에 중앙은행에 전화를 걸어 확인해보니 자기네도 놀랐는데 사실이란다.   금리를 이렇게 올린 것은 조지소로스의 공격방식을 보면 이해할 수 있다.조지소로스는 적은 자기자금을 갖고 반복적인 차입 즉 큰 레버리지를 통해 높은 수익을 올리는 방식이다.따라서 투기세력이 공격한 통화의 환차익이1개월만에5%정도 발생한다 하더라도 차입비용이 높아지면 수익을 기대할 수 없다.즉 시중금리가 악덕 대부업체 수준인 연500%정도가 되면 한 달 금리가40%가 넘는 것이기 때문에 평가절하에 따른 환차익이 아무리 커도 이자를 내고 나면 손해가 된다.당시 스웨덴은 부동산 거품과 그 후유증으로 인한 은행부실 등 어려움이 컸으나 시중금리를500%까지 올리는 극약 처방을 채택했다.   1992년9월 유럽 금융시장은300년의 역사를 가진 영란은행의 치욕,일부 국가의 자본규제 재도입,대부업체도 놀랄 수준으로의 금리 인상 등 그야말로 아수라장이었다.   그러나 유럽통합의 핵심6개국(프랑스,독일,베네룩스3국,이태리)중 이태리를 제외한5개국은 투기세력의 공격에도 불구하고 잘 버티고 있었다.이들 나라 중 투기세력의 가장 큰 먹잇감은 프랑스였다.독일은 유럽의 기축통화로 공격대상이 될 수 없었고 네덜란드는 경제기초여건이 워낙 탄탄해 빈틈을 찾기 어려웠고 벨기에는 정부부채 과다 등의 문제가 있었으나 경제규모가 작아 먹잇감으로 충분하지 못했다.(룩셈부르크는 자국통화가 없었고 벨기에 프랑을 법정통화로 사용하고 있었다.)   프랑스는 전통적으로 안정과 경쟁력 강화보다는 고용과 복지 확대를 우선하는 국가였다.그러나1980년대 말부터 단일 통화 도입 등을 염두에 두고 안정을 우선하는 방향으로 정책기조를 변경함에 따라1992년 유럽 통화위기시에는 물가가 안정되고 경상수지도 흑자기조를 유지하고 있었다.즉 거시경제지표만으로는 프랑스 프랑화가 독일 마르크화에 비해 약세를 보일 이유가 없었다.당시 독일은 통독에 따른 부담으로 경상수지 적자,높은 물가,정부부채 증가의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투기세력은 경제지표보다는 프랑스의 안정정책의 지속가능성,프랑스 중앙은행의 독립적인 통화정책 수행능력 등이 독일보다 못하다는 이유를 주요 근거로 하여 프랑화를 공격하였다.   유럽의 여러 나라에서 수익을 올린 투기세력들은 거의 모두 마지막 일전을 위해 프랑스로 모여들어 정책당국과 투기세력간의 거대한 싸움판이 벌어졌다.투기세력은 규모도 커졌고 공격방식도 파생금융상품과 역외금융을 활용하는 등 조지소로스가 초기에 사용한 방식보다 더 다양해졌다.프랑스 정부는 감독당국을 통한 창구지도,외환보유액을 활용한 시장개입,구두경고 등을 통해 대응하였다.   당시 프랑스 재무장관은 프랑스 프랑화가 경제성과와 관계없이 공격을 받는 것은 단일 통화의 출현을 막기 위한 영미계(앵글로색슨)자본의 계획된 행동이라는 음모론도 제기하였다.그리고 그는 지금이 프랑스 혁명기였다면 투기꾼들을 반혁명분자로 모두 잡아들여 단두대(길로틴)에서 목을 잘랐을 것이라는 극언도 서슴치 않았다.투기세력에 대한 비판이 거세지자 조지소로스는 영국 파운드화에 대한 공격은 자신이 했지만 프랑스 프랑화에 대한 공격을 하지 않고 있다는 인터뷰까지 했다.즉 자신은 경제기초여건을 기준으로 투자를 하기 때문에 경제기초여건이 괜찮은 프랑스는 공격대상이 아니라는 인터뷰를 했다.   이러한 정책당국의 노력과 경고에도 투기세력의 공격은 아랑곳없이 계속되었다.투기세력은 프랑스 중앙은행의 시장개입에 따른 외환보유액의 추정 감소규모를 매일 공개하며 이대로 가면 프랑스 중앙은행의 외환보유액은 곧 고갈될 것이라고 공언하는 상황이 되었다.   프랑스는 영국보다는 오래 버텼지만 곧 유럽환율조정메카니즘 탈퇴 등 백기를 들 것 같은 분위기가 당시 시장을 지배했다.이러한 상황을 극적으로 반전시킨 것은 독일 중앙은행인 분데스방크의 성명서였다. “분데스방크는 프랑스 경제상황이 양호하다고 평가하고 있으며 프랑스 중앙은행과 분데스방크의 협력관계가 완벽하며 유럽환율제도의 안정을 위한 분데스방크의 의지도 확고하다.그리고 프랑스 중앙은행이 필요로 하는 마르크화는 분데스방크가 제한없이 지원할 것이다.”라는 요지의 성명서가 발표되자 투기세력은 손해를 보고 싸움을 접을 수밖에 없었다.프랑스 중앙은행은 외환보유액의 고갈을 걱정할 필요가 없어졌기 때문이다.   프랑스 프랑화 공격에 참여하지 않은 조지소로스 등을 제외하고 대부분의 투기세력은 유럽 다른 나라에서 번 돈을 프랑스에서 거의 잃은 셈이다.프랑스 프랑화와의 싸움에서 영국 파운드화와는 달리“중앙은행과 맞서지 마라.”라는 시장의 격언이 유효하였다.단지 중앙은행이 프랑스 중앙은행이 아니고 독일 중앙은행이었지만.... 시장의 신뢰를 받는 제대로 된 중앙은행을 갖고 있다는 것은 한 국가의 큰 자산이다. 위기의 재연 그리고 교훈 유럽 통화위기는 프랑스 대혈투이후 아일랜드 벨기에 등에서의 자잘한 싸움은 있었지만1993년 상반기까지는 진정되는 듯 했다. 그러나 큰 지진 뒤에 여진이 따라오듯이 투기세력은 빈틈을 찾아 다시 공격을 했다. 1993년 7월 독일 중앙은행이 시장의 금리인하 기대와 관계없이 금리를 동결하자, 투기세력은 EC국가 간 정책공조가 어렵겠다는 이유를 들어 프랑스 프랑화, 벨기에 프랑화, 덴마크 크로네화 등을 다시 대대적으로 매각하였다.   1992년 프랑스 프랑화와의 싸움에서 재미를 못 본 투기세력들은 천천히 강하게 장기전까지 생각하며 공격하였다. 정책당국의 대응은 프랑스 벨기에 중앙은행의 시장개입, 독일 중앙은행의 지원, 국가간 정책공조 등일 것이고 이것이 1992년과 달리 흔들릴 수도 있다고 보았다. 즉 저성장과 고실업의 어려움을 겪고 있던 프랑스, 벨기에 등은 긴축정책이 국민의 지지를 못 받게 되고 독일은 계속된 지원에 부담을 느끼게 되면 정책공조가 무너질 것으로 보았다. 이에 대한 정책당국의 대응은 시장이 전혀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전격적으로 이루어졌다.   1993년 7월 29일(목) 독일 중앙은행의 금리동결조치가 있고 투기세력의 공격이 시작되자 그 주말인 1993년 7월 31일(토)과 8월 1일(일) 브뤼셀에서 EC재무장관, 중앙은행 총재회의를 개최하였다. 이 회의에서 유럽환율조정메카니즘(ERM) 체제를 전면 개편하여 바로 다음날 즉 월요일부터 시행하였다. 즉 ERM의 환율변동 허용폭을 종전 상하 2.25%에서 상하15%로 대폭 확대하였다. 독일 마르크화와 네덜란드 길더화는 양국간의 협정에 의해 종전과 같이 상하 2.25%로 유지하는 한편 나머지 국가는 상하 15% 범위내에서 자유롭게 움직이도록 하였다. 사실상 변동환율제로 전환하여 투기세력의 허를 찌른 셈이다. 이렇게 되자 시장에서 싸움의 상대가 바뀌게 되었다. 즉 투기세력과 중앙은행의 싸움에서 투기세력과 또 다른 생각을 갖고 있는 투기세력간의 싸움으로 변한 것이다. 종전에는 약세통화 환율이 변동허용폭(2.25%) 하한 근처에 오면 투기세력이 “약세통화 매도 강세통화 매입”방식으로 공격하다가 평가절하가 이루어지면 수익을 챙기는 방식이었다. 이제 변동폭이 커지게 되자 기준환율대비 3% 5% 정도의 약세가 된 상황에서 매도 공격을 해도 중앙은행의 개입(투기세력 매도물량의 매입)은 없고 그 환율수준이 그 나라의 경제기초여건에 너무 약세가 되었다고 생각하는 또 다른 투자자가 반대방향으로 베팅하게 된다. 즉 투자자의 공격근거 환율이나 중앙은행의 개입기준 환율로 작용했던 ERM의 변동허용폭이 실질적으로 사라지자 현재의 환율수준에 대한 평가가 시장참가자에 따라 다르게 된 것이다.   따라서 1992년 9월과 같이 한쪽 방향으로 일방적인 베팅은 위험하게 된 것이고 수익도 보장되지 않는 상황이 된 것이다. 실제로 환율변동 허용폭을 15%로 확대한 직후에는 약세통화의 환율이 크게 오르고(절하되고) 변동성이 커졌으나 시간이 지나면서 과거의 변동허용폭(2.25%) 하한 근처에서 환율이 안정되어 갔다.   1992년의 유럽 통화위기는 ERM과 같은 고정환율제가 장기적으로 안정적이지 못하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즉 변동환율제나 완전고정환율제(단일통화)로 전환되지 않는 한 투기세력의 공격대상이 될 가능성이 항상 있다는 것이다. ERM체제 참가국가간 시장상황과 경제여건을 감안 환율이 결정되면 초기에는 전통적 약세통화국 통화에 대한 투자 수요가 증가한다. 초기에는 환율이 안정되어 있는 데다 통상 약세통화국은 고금리이기 때문이다. 이로 인해 약세통화국은 기초여건이 나빠져도 상당기간 환율을 안정시킬 수 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조금씩 시장에서 의문이 생기면 환율을 변동허용폭 하한에 근접하다가 투기세력이 대거 공격하면 하한이 무너져 평가절하가 이루어지곤 하였다. ERM의 환율변동 허용폭이 15% 대폭 확대됨에 따라 투기세력이 쉽게 공격할 수 있는 기준점이 없어졌다. 또한 투기세력은 공격할 환율수준을 스스로 찾는 것도 쉽지 않고 또 찾아서 공격하면 변동환율제의 특성상 환율이 바로 변하기 때문에 지속적인 공격도 어려워진 것이다.   유럽 통화위기는 유럽 금융시장에 큰 충격을 주고 유럽경제에도 여러 면에서 피해를 주었지만 한편으로 유럽 경제통화동맹 즉 단일통화의 필요성을 더 강화시키는 계기가 되었다.유럽 통화위기가 일부 유럽 사람들의 주장대로 유럽 단일통화의 출현을 막기 위한 영미계 세력의 음모였다면 그 음모는 실패한 셈이다. 유럽 통화위기를 딛고 1999년 1월 유럽 중앙은행이 출범하고 유로라는 단일통화가 도입되었기 때문이다.   한국의 일부 학자들은 동북아 경제통합과정의 하나로 한중일 외환보유고의 공동관리, 한중일 통화간 환율고정 등을 주장하고 있다. 물론 단시일내에 이루어질 과제는 아니고 상당한 미래에 이루어질 가능성이 있겠지만 이는 유럽 통화위기 사례에서 볼 때 위험성은 내포하고 있는 방안이다. 단일통화와 변동환율제 사이의 어정쩡한 고정환율제도는 쉽게 투기세력의 공격대상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투기세력이 조그만 빈틈을 찾아 이유를 만들고 여러 다른 투기세력을 끌어들여 한쪽 방향으로 계속 공격하면 경제상황이 크게 나쁘지 않아도 시장이 붕괴될 수 있다. 대표적인 사례가 지금까지 설명한 1992년의 유럽 통화위기이고 이러한 외환위기를 자기실현적(self-fulfilling) 기대에 의한 위기라 한다.   한국은 금융·실물면에서의 개방도가 매우 높고 국내 금융기관의 국제금융 역량이 부족하다. 즉 단기외채 비중과 주식시장의 외국인 비중이 높고 GDP대비 수출입비중이 높은 데다 금융기관이 외화자금 조달능력은 안정적이지 못해 한국경제는 외부충격에 취약한 구조이다. 동북아 경제통합과 금융협력은 의미있는 과제이긴 하나 한중일 통화간 고정환율제는 매우 조심하여야 할 과제이다. 물론 고정환율제가 주는 환위험 제거 등 혜택은 있지만 단일통화가 아닌 한 환위험의 완전 제거는 불가능하고 고정환율제가 깨질 때 한꺼번에 비용을 지불하게 된다. 유럽통합과 그 과정에서의 여러 가지 사건은 남의 이야기가 아니고 우리 미래에 참고할 만한 가치가 있다. 특히 현재 진행되고 있는 유럽 재정위기는 바로 우리경제에 영향을 미치고 있으며 시사하는 바도 많다.   - 송현경제연구소장 정대영 *사진을 클릭하시면 송현경제연구소로 이동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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