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유럽통합과 통화, 재정위기 (2) (정대영)

김대호(사회디자인연구소장) 승인 2013.07.03 16:30 의견 0

-철강석탄공동체에서 단일 통화까지

1952년 7월 정식으로 출범한 유럽철강석탄공동체(ECSC)는 유럽공동체의 창시자라 불리는 장 모네에 의해 성공적으로 뿌리를 내렸다. 유럽철강석탄공동체의 성공으로 자신감을 얻은 프랑스, 독일, 베네룩스 3국, 이태리 6개국은 유럽통합을 확대해 나갔다. 1957년 6개국은 역내 무역장벽 제거, 공동 통상정책 실시, 관세동맹 추진 등을 내용으로 하는 로마조약을 체결하여 유럽경제공동체(EEC)를 출범시켰다. 그리고 새로운 에너지원으로 중요성이 커지고 있는 원자력의 공동 이용을 위한 유럽원자력공동체(EURATOM)도 설립하였다. EEC와 EURATOM은 1958년 1월부터 업무를 수행함으로써 유럽통합의 기반이 구축되었다.
1969년에는 유럽통합을 가속화하고 효율적인 업무추진을 위해 ECSC, EEC, EURATOM을 통합하여 유럽공동체(EC)를 출범시켰다. 유럽공동체는 역내 무역장벽 제거뿐만 아니라 공동 통상정책, 공동 관세적용, 공동 농업정책 등 경제정책의 일부를 각국 정부로부터 이양받아 공동으로 수행함으로써 초국가적 기능이 확대되었다. 즉 한EU FTA의 예에서와 같이 대외무역과 같은 통상정책은 개별 국가가 아닌 유럽공동체가 회원국을 대신하여 수행하는 것이다. 이어 초국가적인 기구에 국가정책의 일부를 넘기는 것을 거부하던 영국을 포함 아일랜드, 덴마크(1972년), 그리스(1981년), 스페인, 포르투갈(1986년) 등 6개국이 추가로 가입하여 1986년에 EC의 회원국이 12개국으로 확대되었다.
다음 단계 유럽통합은 관세동맹, 공동시장의 형태에서 EC 지역을 하나의 시장(단일시장,single market 또는 internal market) 형태로 질적인 전환을 시키는 것이었다. 1986년 2월 유럽단일의정서(Single European Act)을 체결하여 회원국 간 상품과 생산요소(자본 노동)의 자유로운 이동을 제한하는 물리적 장벽(출입국 검사세관검사 등), 기술적 장벽(비관세장벽), 재정적 장벽(간접세 등)을 제거하기로 하였다. 이를 위해 수많은 EC 차원의 법률 및 지침 제정과 각국의 법제도 정비가 지속적으로 이루어졌고 상품, 노동, 자본의 자유 이동은 점차 확대되었다. 이러한 노력의 결과로 1993년 1월에 EC는 역내 시장이 통합되어 단일시장이 출범한다고 정식으로 선언할 수 있었다. 이에 따라 상품과 자본의 자유로운 이동뿐 아니라 노동의 이동도 자유로 와져 이태리 사람이 독일에 가서 식당을 열 수 있고 독일 의사가 주말을 이용해 영국에 가서 파트타임으로 일을 할 수 있게 될 정도가 되었다. 이것만도 인류 역사상 다른 나라를 정복하거나 식민지로 삼지 않고, 대화와 타협으로 이룬 대단한 국가 간 통합이라고 보여진다.
이러한 상품과 생산요소의 자유로운 이동을 뒷받침하고 단일 시장의 경제적 효익을 극대화하기 위해서는 유럽통합의 질적 수준을 또 한 번 높여야 할 필요성이 커졌다. 통합은 그자체로 또 다른 통합을 필요로 하게 된 것이다. 즉 단일통화의 도입과 보다 높은 단계의 정치적 통합이 요구되는 단계에 오게 것이다. 그러나 통화동맹과 정치동맹은 지금까지 통합과는 차원이 다른 과제이었다. 유럽의 단일통화 도입은 1970년대부터 논의는 있었으나 구체화되지 못하고 추진동력도 얻지 못하고 있었다. 단일통화 도입 등 경제통화동맹의 실행계획은 1989년 4월 EC집행위원장이던 작 들로르(Jaques Delors)에 의해 수립되었다. 들로르의 보고서를 기초로 1990년대에 들어 유럽경제통화동맹(EMU)을 단계적으로 추진하게 된 것이다.
이와 함께 1989년대 말 독일 통일과 동서냉전 체제의 붕괴 등으로 유럽 정치안보 환경이 변하면서 유럽이 안정을 위해 정치통합의 필요성도 커지게 되었다. 이러한 경제정치상황을 반영, 12개 회원국은 1991년 12월 네덜란드 마스트리히트에서 역사적인 유럽연합조약(Treaty of European Union)을 체결하였다. 유럽연합조약은 마스트리히트조약으로도 불리며 단일통화 도입 등 강력한 경제통화동맹(EMU)과 함께 공동 외교안보정책, 유럽의회기능 강화, 내무사법 협력 등 초보적인 정치통합이 핵심내용이다.
이는 유럽통합의 거대한 진전으로 실현가능성에 대한 회의도 많았고 조약의 비준 자체도 순조롭지 못하였다. 당시 필자는 유럽통합의 중심지인 브뤼셀에 있었는데 만나보았던 미국 일본 한국 등 외국인은 거의 대부분 통화통합이 불가능하거나 되더라도 몇 십년은 걸릴 것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벨기에 프랑스 독일인들도 확신을 갖지 못한 사람이 많았다. 즉 당시 마스트리히트조약(유럽연합조약)은 유럽인의 꿈과 희망을 표현한 것이지 실현될 수 있는 내용이 아니라는 생각이 많았다. 유럽연합조약은 각국의 비준과정도 험난했다. 일부 국가의 국민투표 부결, 재 국민투표, 위헌재판 등 어려운 과정을 거쳐 1993년 10월 비준이 완료되어 1993년 11월 1일부터 정식 발효가 되었다.
비준이라는 각국 국민의 동의 절차뿐 아니라 1992년 9월에 시작된 유럽통화위기도 유럽통합의 큰 시련이었다. 1992년의 유럽통화위기는 금융을 공부하는 사람에게 흥미있는 주제일 뿐 아니라 현재 진행 중인 유럽재정위기에도 시사점이 있어 별도로 조금 자세히 이야기 해보려 한다. 비준 통화위기 등 많은 어려움을 극복하고 유럽연합조약이 발효되자 유럽통합은 기구명칭도 EC에서 EU로 변경되고 성격도 공동체에서 국가연합으로 질적 변화를 이루었다. 이와 같이 어려운 통합과정에서 프랑스의 미테랑 대통령, 독일의 콜 수상, 들로르 EU집행위원장 3인의 노력과 신뢰가 난관을 극복하는 기초가 되었다 .
유럽경제통화동맹(EMU)의 단계적 실행계획에 따라 1999년 1월 유럽중앙은행(ECB)이 설립되어 단일 통화정책을 수행하였다. 그러나 이때는 유로화라는 화폐단위는 도입되었으나 화폐나 동전과 같은 유로 실물은 도입되지 않고 장부상으로 유로가 사용되었다. 실물 유로화는 2002년 1월 1일 도입되어 마르크화, 프랑화, 길더화, 리라화 등 유럽 각국의 통화를 대체하였다. 1999년 1월 유로화 도입 당시 환율은 1유로당 1,174달러로 유로화가 미달러보다 조금 높은 가치로 출발했다.
1995년 스웨덴, 핀란드, 오스트리아 3개국이 EU에 추가적으로 가입하여 1999년 1월 유로화 도입시 EU회원국은 15개국이었다. 15개 회원국중 유로화를 도입한 국가는 11개국이었다. 영국, 덴마크, 스웨덴 등 3개국은 단일통화 도입을 원하지 않았고 그리스는 단일통화 도입을 위한 조건을 충족하지 못해 유로화를 도입하지 못했다.
EMU조약에 따르면 EU회원국이라 해서 당연히 유로화를 사용할 수 있는 (유로존 가입) 권한을 갖는 것이 아니었다. 회원국 중 물가, 금리, 환율, 재정적자 및 정부부채비율 등이 일정기준을 충족하고 중앙은행제도가 유럽중앙은행의 틀에 맞는 국가만이 유로라는 단일통화를 사용하는 나라가 될 수 있게 되어 있다. 유럽재정위기가 불거진 지금 상황에서 보면 유로존 가입조건을 엄격하게 적용하여 그리스 이외에 다른 국가의 가입을 막고, 그리스 경제가 더 탄탄해 진 다음 가입을 허용했다면 유로화가 덜 흔들렸을 것이라는 후회도 있다.
1990년대 중반 유로화 도입준비 과정에서 가장 큰 논의의 하나가 가입조건을 엄격히 적용하여 경제가 탄탄한 소수 국가만으로 단일통화를 출범시키느냐, 아니면 가능한 많은 나라를 참여시키느냐에 대한 논쟁이었다. 당시에 지금 한국의 상호저축은행 퇴출명단과 같이 그리스, 포르투갈이 단일통화에 참여 못한다느니, 스페인, 이태리도 참여 못할 것이라느니 라는 소식들이 언론에 자주 오르내렸다. 결국 희망하지 않는 영국, 덴마크, 스웨덴과 경제상황이 아주 안 좋은 그리스를 빼고는 11개국이 유로존에 참여하게 되었다. 모양은 좋았지만 나중에 해결하기 어려운 난제를 만들게 되었다. 그리스도 억지로 가입조건을 충족시켜 2001년 1월에 유로존에 가입하였다. 뒤를 이어 EU가입국과 유로존 가입국가는 계속 늘어났다.
2012년 6월 EU회원국은 27개국, 총인구는 5억명, 유로존 가입국은 17개국이다. 그리고 모나코, 산마리노, 바티칸, 산도라, 리히텐슈타인 등 유럽 소국들은 유로존(유럽중앙은행시스템) 가입국은 아니지만 유로화를 자국통화로 사용하고 있다. 또 유로화는 동유럽, 아프리카, 중동 등 유럽 인접국가에서 자유롭게 유통되고 있어 현금통화 사용량 기준으로 보면 2007년 말 부터 미 달러화보다 더 많이 사용되고 있다. 유로화당 미달러화 환율은 1999년 유로화 도입해에는 1.1 내외이었고 2001~2002년에 0.9 내외로 떨어져 유로화의 가치가 하락했으나 2008년에는 1.5로 상승하였다. 2012년 들어서는 유럽재정위기 영향 등으로 유로당 달러환율이 1.22 정도를 유지하고 있어 유로화 도입 시보다는 조금 강해진 상태이다.
유로화는 이처럼 도입이후 초기에 다소 불안한 시기를 지나 2000년대 중반부터 단일통화정책, 금융시장 통합 등이 순조롭게 이루어져 성공적인 정착단계에 들어가는 듯 보였다. 그러나 2012년 들어 유럽재정위기가 심화되면서 유로존 해체 가능성마저 제기되고 있다. 1952년 유럽석탄철강공동체 출범이후 가장 큰 질적 통합인 단일통화제도가 위기를 맞고 있으며 이는 유럽통합 자체가 흔들릴 수 있는 문제가 되고 있다. (유럽재정위기와 유로화의 미래에 대해서는 다음에 자세히 이야기할 계획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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