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공화국이 온다> 서문

미흡한 부분은 많지만 부끄럽지는 않습니다.

사회디자인연구소 승인 2020.01.08 10:43 의견 0

이 글은 <7공화국이 온다>-7공화국의 플랫폼 디자인 방법론과 시안-의 서문 입니다. 

집필에 6년 걸렸습니다. 수정, 보완, 각주에 앞으로 최소 10년은 더 걸릴 것 같습니다. 다시는 쓸 수 없는 필생의 역작의 초판으로 자부합니다. 여전히 미흡한 부분은 많습니다만 부끄럽지는 않습니다.  정말 혼신의 힘을 다했습니다. 

1월 14일(화) 오후 5시부터 서울시 프란치스코 교육회관(중구 정동길9) 4층 대강당에서 출판기념토론회를 개최합니다. 머리 숙여 초청합니다.

 

시대의 황혼

“미네르바의 부엉이는 황혼 무렵에야 난다”

1820년 헤겔 『법철학』 서문에 나오는 유명한 문장이다. 미네르바의 부엉이는 근본적 성찰을, 황혼은 한 시대의 상식으로 군림해 온 가치, 제도, 정책의 모순이 터져나오는 시기를 말한다.

 

나에게는 지금이 시대의 황혼이다. 문재인정부는 1980년대 민주화운동, 노동운동, 통일운동, 환경운동의 가치를 거칠게 밀어붙이면서 시대의 황혼을 선명하게 보여주고 있다.

 

막대한 예산을 퍼부었음에도 불구하고 20년 가까이 지속되는 초저출산, 매 5년 마다 1%p씩 떨어지다가 이제는 잠재성장률에도 못 미치는 경제성장률, 중국의 거센 도전을 받고 있는 주력산업의 위기, 70년 각고의 노력으로 일으킨 원전 산업의 고사 위기, 정치의 본말전도와 만연한 지대(rent)추구, 광장에서 일렁이는 정치적 공포, 증오, 혐오, 청년들의 ‘헬조선’ ‘이생망’ 한탄, 변화와 개혁 가능성에 대한 회의와 냉소, 비핵화는 물건너 가고, 한미동맹은 껍데기만 남고, 마침내 김정은의 핵 공갈에 떨면서 목숨을 구걸해야 하는, 불안하고 비루한 시대가 다가오는 느낌 등.

 

문정부가 체현하고 있는 정신과 방법의 본질을 아는 사람들에게는 이 시대는 황혼을 지나 짙은 어둠으로 질주하고 있다. 그런데 현실을 다르게 보는 사람들에게 문정부는 희망의 새아침을 여는 존재일 것이다. 이들은 박근혜 탄핵, 대통령 선거, 지방선거를 거치면서 치명상을 입고 비틀거리는 이른바 ‘반민주, 반민중, 반민족, 반통일 세력’의 숨통을 끓어놓을 역사적 기회가 목전에 왔다고 믿는다.

 

역사와 현실에 대한 완전히 상반된 평가는 우리 사회를 총칼만 안든 내전 상태로 몰아넣었다. 남북 분단도 모자라, 대한민국은 적대하는 양 진영으로 완전히 갈라졌다. 한 국가 두 국민이다. 도대체 어쩌다가 대한민국이 이 모양이 되었는가? 남미의 혁명 영웅 시몬 볼리바르(1783~1830년)는 47세에 결핵으로 죽기 한달 전, 대통령과 총사령관직을 사임하면서 편지에 이렇게 썼다.

 

“나는 12년간 통치하면서 몇 가지 확신을 얻게 되었다…일신을 혁명에 바친 사람들은 바다에 쟁기질 한 것이나 다름없다…이 나라는 필연적으로 고삐 풀린 대중의 손에 들어갔다가 그들도 모르는 사이에 시답잖은 폭군들 차지가 될 것이다…만약 어떤 국가가 원초적인 혼돈 상태로 돌아가는 것이 가능하다면, 그것이 바로 남아메리카가 될 것이다.”

 

볼리바르는 미국독립혁명, 프랑스대혁명과 19세기 프랑스, 스페인의 자유주의 사조에 감동, 감화 받은 시대의 아들이었다. 남미를 미국처럼 만들기 위해 스페인을 상대로 독립전쟁을 벌여 천신만고 끝에 승리하여, 남미의 북단부 대부분을 차지하는 그란콜롬비아(GranColombia)를 건설하고, 초대 대통령(1819~1825년)이 되었다. 하지만 사후 1년도 안되어 몇 개 국가로 분열되었다. 볼리바르 생전에 이미 격렬한 갈등과 뚜렷한 분열 조짐이 있었다. 그래서 죽기 직전 자신이 일생을 바쳐 한 일이 ‘바다의 쟁기질’이라고 한탄했던 것이다.

 

볼리바르는 그 이유를 알지 못하고 유명을 달리하였을 것이다. 니얼퍼거슨(1964~ )은 “시빌라이제이션”에서 볼리바르의 위대한 꿈이 좌절된 이유로, 북미 보다 훨씬 심한 인종적 균열, 토지 소유 집중, 민주적 자치와 통치 경험 부재, 높은 문맹률, 인간의 정신을 맑게 하는 종교의 부재 등을 들었다. 볼리바르는 북미나 유럽에서 잘 자라는 근대적 제도라는 ‘귤’을 풍토가 전혀 다른 남미에 심었다가 ‘탱자’를 얻은 것이다.

 

볼리바르와 1980년대 운동권의 동병상련

볼리바르의 한탄이 나를 전율케 한 것은 베네수엘라 등 오늘날의 남미 현실이 말해주듯이, 북미와 남미의 정신문화적 토양 내지 습속의 차이를 200년이 지나도록 극복하지 못하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볼리바르의 한탄은 남의 일이 아니다. 1980년대 민주화운동가들과 노동운동가들 중 머리가 화석화되지 않은 사람들은 오래 전부터 볼리바르와 비슷한 느낌을 갖고 있었다.

 

특히 노동운동을 하러 남의 신분증을 위조하여 공장 위장취업까지 감행한 나 같은 사람들은, 지금의 노조행태와 노동현실을 보면서 청춘을 바친 운동이 바다에 한 쟁기질이었다는 느낌을 진작에 받아왔다. 문정부 출범 이후 이 느낌은 몇 백배 더 강해졌다. 보편 이성과 상식으로는 도대체 이해가 안되는 일련의 소동들; 김정은에 대한 호감과 열광, 북핵과 미사일 위협에 대한 둔감, 적폐청산-친일청산-반일캠페인, 조국수호-검찰겁박 시위, 선거법과 공수처법 관련 몰상식과 무원칙 등은 정말로 당혹스러웠다.

 

국가경영 내지 민주주의의 기본과 원칙을 짓밟는 일련의 사건들; 탈원전, 최저임금, 공공부문, 비정규직 정책, 징용공 판결, 지소미아 파기, 한미동맹 훼손, 자폭적 군사양보(9.19 군사합의), 북한의 핵보유와 적화통일 의지에 대한 과소평가 등도 마찬가지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놀라운 대통령및 여당 지지율과 정권의 폭정과 실정에 비해 너무 저조한 야당 지지율은 정말로 경악스러웠다. 그것도 언론 탄압이나 여론조사 조작의 결과가 아니기에 더더욱 깊은 탄식을 자아내게 하였다.

 

그런데 역사의 뒤안을 산책하다 보니 귤화위지(橘化爲枳) 현상에 당혹감을 느낀 세대는 우리만이 아닌 것 같았다. 1917년 러시아혁명과 1919년 3.1 운동에 감동, 감화 받아 혁명에 떨쳐나선 1920~30년대 공산주의 혁명가들과 1950년 전후하여 한라산과 지리산에서 빨치산 투쟁을 하면서 대한민국을 지도상에서 지워버리려고 한 이른바 ‘통일 전사’들도 지금의 북한의 참상을 보면 비슷한 느낌을 받지 않을까?

 

적어도 이념과 이론을 신앙의 대상이 아니라, 현실 검증과 성찰을 통해 폐기하거나, 진화시켜야 할 가설로 보는 사람이라면 그럴 것이다. 하지만 생각이 청춘 시절에 멈춰버린 사람들은 북한을 정신적 고향으로 삼는 ‘신념의 투사’ 가 되어, 지금도 미제와 일제에 맞서 독립투쟁을 벌일 지도 모른다. 전두환을 재구속하고, 친일독재의 후예 자유한국당과 보수 박멸을 통한 민주화운동의 완성을 위해 지금도 열심히 투쟁을 할 지도 모른다.

 

왼쪽에 이들이 있다면 오른 쪽에는 1945년 이후 75년 동안 변함없이 빨갱이 박멸 투쟁을 벌이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좌우를 초월하여 이념의 화석들과 독선과 아집의 화신들을 보면서 인간이 원래 그런건지, 한민족이 유독 심한건지 의문을 품게 되었다. 그 답을 구하지는 못했지만, 뭔가 고귀한 이상과 근대적 사상, 제도, 정치를 크게 왜곡하는 거대한 힘을 놓쳤다는 느낌을 받았다.

 

지금 돌아보니 1960년 4.19와 1980년 5.18의 자식들인 민주화운동가들은 우리 사회의 두터운 역사적 업보랄까, 갈라파고스나 다름없는 특이한 습속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였다. 사실 나도 한국이 유럽, 미국은 말할 것도 없고, 중국, 일본과도 매우 다른 사회라는 사실을 깨달은지는 채 10년도 되지 않는다. 내 20대 중반까지 북한은 머리 속에 없는 존재였다.

 

정권은 민주화운동을 북한과 연계하여 용공이니 좌경이니 하며 탄압을 해대니, 북한은 생각하기조차 싫은 존재였다. 이런 지적 공백과 전두환정권에 대한 분노가 ‘북한 바로알기’와 남북한 연계 혁명전략(NLPDR)과 주체사상 선풍을 일으켰던 것이다. 역사, 인간, 습속에 대한 무지와 전(全)정권에 대한 분노가 악령을 영접하게 만든 것이다.

 

하지만 1980년대 후반부터 20년은 소련, 동구, 중국, 북한의 민낯을 알려주는 정보가 홍수처럼 쏟아졌다. 보편 이성과 양심인들에게는 정치체제의 차이에 기인한 남북한의 엄청난 차이를 확인하고 성찰하고 분노하는 시간이었다. 그 이후 지금까지 10여 년은 북미와 남미 외에도, 동양과 서양의 차이도 의외로 크다는 것을 깨닫는 시간자, 체제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조선-남한-북한을 관통하는 질긴 동질성을 확인하며 전율하는 시간이었다.

 

야만적이고 기괴하기 짝이 없는 북한을 뜯어보니 조선의 습속이 엄청나게 많이 남아있다는 것을 발견했다. 그런데 대한민국 역시 두텁고도 질긴 조선적 습속 위에 서 있는 국가였다. 돌아보니 1980년대 초에 나를 운동권 학생으로 만든 것도 사회주의나 휴머니즘이 아니라, 조선 선비, 특히 성균관 유생들과 별로 다르지 않는 정신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지식인 사회는 행여 일본의 식민지배를 정당화한다는 비난을 들을까 두려워 조선의 오욕사, 잔혹사, 실패사, 망국사를 제대로 성찰하지 않았으니 질긴 조선적 습속을 알리가 없었다. 역사 해석도 자뻑과 자학을 오락가락했으니, 역사로부터 배운 것이 별로 없었다. 뿐만 아니라 지금 대한민국을 규율하는 자유, 민주, 공화, 정의, 평등, 법(치), 지방자치, 정당, 국가, 권력, 시장, 노동3권 등 헌법적 가치와 제도도 깊이 천착하지 않았다. 헌법적 가치와 제도라는 귤이 어떤 토양에서 자라난 것인지, 그 정신이 무엇인지를 알지 못하였다.

 

그러다 보니 ‘자유’는 반공과 규제완화로, ‘민주’는 반독재와 광장에서 함성 지르기와 추종하기로, ‘평등’은 격차해소와 반신자유주의로, ‘권리’는 다다익선(多多益善)으로, ‘정의’는 친일청산, 적폐청산, 과거사 신원((伸?)으로, ‘시장’은 약육강식의 정글로 등치 되었다. 법은 보편 이성에 반하고, 현실과 동떨어져도 국회만 통과하면 되고, 공공은 전체를 생각하고 민간은 제 욕심만 밝히는 존재로 간주되었다. 동양적, 조선적 유산의 핵심인 전제적 권력에 대한 경계심은 없었다.

 

선거에서 이기기만 하면 국가가 운용하는 자리, 예산, 공공기관 등을 끼리끼리 나눠먹는 도적정치를 능사로 알았다. 볼리바르가 우려했던 시민적 덕성과 사회 습속이 저열할 때 찾아오는 중우정이나 폭민정 등 민주주의에 내재한 위험에 대한 경계심도 없었다. 복잡미묘한 경제고용, 외교안보 현실을 모르고 결정에 따른 책임을 지지도 않는 현대판 조선 사대부들인 사법관료와 강단 서생 등이 공공과 도덕이름으로 선을 긋고 칼을 휘둘러 국가의 명운과 민생의 안녕에 치명적인 영향을 미치는 결정을 해댔다.

 

역사인식과 도덕성 프레임

나는 공공정책과 담론분석을 업으로 삼는다. 그래서 문정부와 민주당, 86세대 운동권, 친여 언론사와 시민단체의 중심인물, 그리고 ‘조국(曺國)대전’ 시기 조국수호 논객들의 말과 행동을 유심히 살펴왔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문정부의 수구좌파적 행보는 주체사상이나 사회주의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조선적 습속과 결합된 역사인식에서 나온다.

 

이들은 역사와 현실을 노동(프롤레타리아)-자본(부르주아지), 진보-보수, 좌파-우파, 사회주의-자본주의의 대결로 보는 것이 아니라, 조선 사대부들처럼 도덕적인 세력과 부도덕한 세력의 대결로 본다. 역사적 정통과 사통(邪統)의 대결로 본다. 전자는 독립운동과 민주화운동으로 고초를 겪고 곤궁하게 사는데 반해, 후자는 친일-독재-정경관언법유착-재벌-지방토호세력으로 과거나 지금이나 떵떵거리며, 오직 일신의 영달을 위해 살았다고 본다.

 

이들은 3면이 바다인 한반도 땅에서 외침도, 내란도, 민란 위험도 없이 오랫 동안 통치를 해온 조선 사대부들을 닮아서인지, 경세(經世)나 부국강병을 그리 중시하지 않는다. 망국 군주 고종보다 이완용 같은 배신자를 훨씬 증오한다. 이승만, 박정희가 창조한 정치적, 경제적 성과는 그리 중시하지 않고, 소신과 지조를 지키다가 쓰러진 김구를 사표로 삼는다. 한마디로 역사적 정통성(正統性)이나 도덕성이 바로 선 정치세력이 권력을 쥐면 만사가 잘 풀린다고 생각한다.

 

세상의 악덕은 힘센 악당 때문이며, 의도가 좋으면 결과도 좋을 것으로 생각한다. 그러니 복잡미묘한 현실을 연구하지 않는다. 그래서 불평등, 양극화, 비정규직, 고용불안, 저임금은 재벌대기업의 독과식 때문이며, 낮은 복지지출과 공공부문 규모는 김대중, 노무현 정부가 무분별하게 수용한 신자유주의 작은정부 사조 때문이며, 원전은 음험한 원전마피아의 음모고, 남북의 긴장과 반목은 미일외세와 결탁한 수구냉전세력의 음모라고 생각한다. 문정부의 현실인식은 극히 유아적이고, 정책은 몹시 우악스러운 이유다.

 

정통성은 과거사 해석으로 형성되거나 훼손되기에, 반대파의 ‘흑역사’에는 눈을 부릅뜨지만, 현실과 미래의 도전에는 눈을 감는다. 역사 왜곡, 은폐, 조작은 기본이다. 그런 점에서 성리학에 찌든 조선 사대부나 북한 집권 세력의 사고방식과 너무 닮았다. 조선 사대부는 성인의 도통을 이은 당파를, 민주화 세력은 민주화투쟁 주도세력을, 북한은 항일무장투쟁에 빛나는(?) 백두혈통을 ‘정(正)’으로 삼았다.

 

이들은 다른 세력을 ‘사(邪)’로 폄하하고, ‘정’이 ‘사’를 제압하면 모든 것이 해결된다고 믿는다. 우리 국민의 사고방식이나 습속 자체가 ‘정통성’ 프레임으로 역사를 해석하는데 익숙하기에 이런 유아적 사고방식이 위력을 발휘할 것이다. 아무튼 지향하는 체제는 달라도 역사와 현실 인식이 비슷하고, 정통성의 근원도 비슷하고, 주된 대립물(미국, 일본, 보수·기득권)도 비슷하니 주사파·사회주의자와 비슷해 뵈는 것이다.

 

보고 싶은 것만 보는 ‘확증편향 환자’들의 눈에는 방안에 들어와 있는 코끼리도 보이지 않는다. 역사적 정통성과 도덕성에 빛나는 문정부가 하는 모든 일은 선이요, 정의요, 개혁이다. 당연히 이를 반대하는 것은 수구·보수·기득권의 음험한 음모다. 이들의 눈에는 대한민국은 온통 보수·기득권이 지배하는 나라다. 문정부와 민주, 진보, 개혁 세력은 너무나 왜소한 존재다. 인지부조화의 전형이다.

 

도덕과 부도덕 프레임은 ‘항일과 친일’, ‘민주와 독재’, ‘정의와 불의’, ‘이타주의와 이기주의’ 프레임으로 변주된다. 선악(善惡), 정사(正邪)는 도덕과 부도덕 프레임의 단순화 버전이고, 그 조상은 군자(君子)와 소인(小人) 프레임이다. 문정부는 이 오랜 습속에 개혁과 수구·기득권·적폐 프레임을 얹으려 하였다.

 

노조는 99%와 1%(재벌 등) 프레임을 얹으려하고, 북한과 주사파와 낭만적 민족통일론자들은 민족과 외세, 평화와 전쟁, 민족화해협력과 냉전대결 대립 프레임을 얹으려한다. 하나같이 어떤 정책이 국리민복에 보탬이 되냐를 묻는 것이 아니라, 누가 도덕적이냐를 묻는다. 대한민국이 어디쯤 있고 어디로 가야 하느냐를 묻는 것이 아니라, 누가 통치의 정당성=정통성이 있냐를 묻는다. 이 정통성의 근거는 어디까지나 과거사다. 현재 당면한 국가적 현안 문제 해결 능력과 비전이 아니다.

 

자유한국당과 보수의 수수께끼

국가경영의 기본과 원칙에 비추어 보면 문정부와 민주당에 비해 이명박근혜정부와 한나라당·새누리당·자유한국당의 악덕이 훨씬 적다. 정치경제적 기득권에 집착하는 무소신의 웰빙 보수라는 비난을 받지만, 그 이념과 행보는 국가경영의 기본과 원칙에 정면 반하지는 않는다.

 

한미동맹과 한일관계를 훼손하지도 않을 것이고, 9.19 군사합의 같은 것도 하지 않을 것이고, 김정은의 비핵화 약속도 덜컥 믿지 않을 것이고, 탈북 어부를 강제 송환하지는 않을 것이다. 탈원전으로 산업과 환경을 파괴하는 짓도 하지 않을 것이고, 진상규명 한다면서 과거사를 파고 또 파고 하지도 않을 것이고, 최저임금, 공공부문, 비정규직, 노조 정책도 확연히 다를 것이다.

 

적어도 문정부와 민주당 보다는 자유민주주의, 법치주의, 시장경제, 해양문명(미국, 일본, 유럽)에 훨씬 친화적이다. 무엇보다도 청년 시절에 민주주의나 사회정의를 위해 온 몸을 던져 본 사람이 별로 없어서 도덕적 오만과 독선이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과오나 악덕에 비해 너무 가혹한 징벌(문정부의 폭정과 실정에 비해 저조한 제1야당 지지율 등)을 받는 것은 왜 일까? 이는 정치를 정사(正邪) 프레임으로 보는 조선적 습속을 뻬놓고는 설명되지 않는다.

 

박근혜 대통령의 실정과 탄핵소추 과정에서 드러난 부도덕과 정권 핵심들의 기회주의 등은 통치의 정당성(정통성)이 자유한국당으로 대표되는 보수에 있지 않다는 확신을 널리 퍼뜨린 계기였다. 그런데 실은 이런 분석도 일면적이다. 지역에 따라 크게 차이가 나는 대통령 지지율은 지역민이 얻는 공직과 예산 등 특수이익에 대한 욕망과 개발연대에 뼈에 사무친 소외·피해 의식이라는 공포의 관점에서도 보아야 진실에 좀 더 다가갈 수 있다.

 

거기에 20~30대, 특히 여성들이 예민하게 반응하는 혐오감과 추함도 덧씌워졌다. 요컨대 민주화운동의 세례를 받은 중장년은 유구한 습속인 정통성과 도덕성 프레임으로 세상을 보고, 호남은 개인적, 지역적 손익을 중심으로 보고, 20~30대는 직감적 호불호 내지 매력과 혐오를 중심으로 보니 ‘묻지마 지지’와 ‘묻지마 혐오’ 현상이 나타나는 것이다. 따라서 자유한국당으로 대표되는 보수가 도덕성(일신의 영달만을 위해 살아왔다는 이미지), 정통성, 혐오감, 비루함(기회주의)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면, 조선적, 유아적, 수구좌파적 정권의 폭정은 계속될 것이다.

 

이런 상황이 지속되면 한민족이 세운 역사상 최고, 최강의 국가인 대한민국도 볼리바르가 남미의 미래를 전망했듯이 권력이 고삐 풀린 대중의 손에 들어갔다가 정치를 예능 수준으로 떨어뜨리는 시답잖은 포퓰리스트나 무지몽매한 혼군의 손에 들어가는 것을 반복하면서, 22세기까지 갈 지도 모른다. 그러면 중국, 일본과는 비교조차 할 수없는 필리핀 수준의 3류 국가가 될 수밖에 없다.

 

나는 수백년 뒤 역사가들이 지금 우리가 사는 시대를 이렇게 서술할까 두렵다. 남북한 공히 조선적 습속을 깨닫지 못한 채 근대 문명을 이식하여 반짝 성공을 거두고, 긴 지체, 퇴행과 극심한 갈등으로 좌초되어버린 사회라고! 북한은 근대 일본 문명의 가치를 모르고, 이를 거칠게 쓸어버리자, 기저(基底)에 깔려있던 말기 조선 문명이 일거에 부상했는데, 그 위에 근대 서구 문명 중 가장 후진 스탈린 시대 소련 사회주의 문명을 이식하는 바람에 세계적인 야만 국가를 건설했다고!

 

남한은 기저(基底) 조선 문명을 제대로 파내지 않는 등 정신문화적 기초공사를 소홀히 한 상태에서, 일본, 영국, 미국 문명이라는 장대한 건축물을 올려 20세기에 기적을 만들었으나, 민주주의에 내재된 모순을 극복하지 못하고, 제4차산업혁명과 중국의 부상이라는 외적 환경에 적응하지 못하여, 21세기 들어 급속히 조로하여, 2040~50년경에는 3류 국가로 전락했다고!

 

문재인정부와 민주당과 진보세력에 대해 서술한다면 자신의 반짝 성공을 가져온 동인과 행운을 모르고, 위대한 기적을 만든 정신과 방법을 파괴하는데 여념이 없었다고 서술할 것이다. 그래서 이 파괴 행위를 중국의 문혁시대의 파괴행위와 아프칸 탈레반들의 바미얀석불 파괴 행위와 비슷한 반열에 올려 놓지 않을까 한다. 나는 이런 반역의 역사를 반전시키기 위해 이 책을 썼다.-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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