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7체제와 민주화운동(1) 낡은 고대광실

-노조의 힘 강해지고, 노동억압적 가치·제도·정책 약화. 사법부도 점점 ‘기업 억압적’으로 변화

사회디자인연구소 승인 2019.11.06 09:42 | 최종 수정 2019.11.11 12:04 의견 0

■ 부분적 개선이나 특수한 자유와 권리 상향이 전체적 퇴행, 고장으로 돌아오는 합성 오류 극심

■ 체제·제도와 사람, 정치인과 시민적 지성·덕성의 문제 등 구분되지 않으니 즉자적 처방만 난무

■ 노조의 힘 강해지고, 노동억압적 가치·제도·정책 약화. 사법부도 점점 ‘기업 억압적’으로 변화

 

만 칸의 낡은 집

 

이율곡은 1574년(선조 7년)에 올린 상소문(만언봉사)에서, 어디서부터 어떻게 손을 써야 할지 모르는 당시 조선의 상황을 만 칸의 큰 낡은 집에 비유했다.

 

“만 칸의 큰 집을 오랫동안 수리하지 아니하여, 크게는 들보에서 작게는 서까래에 이르기까지 썩지 않은 것이 없는데 서로 떠받치며 지탱하여 근근이 하루하루를 보내고는 있지만, 동쪽을 수리하려 하면 서쪽이 따라 기울고, 남쪽을 보수하려 하면 북쪽이 일그러져 무너져버릴 형편이라, 여러 목수들이 둘러서서 구경만 하고 어떻게 손을 쓸지도 모르고 있습니다. 그대로 두고 수리를 하지 않는다면 날로 더욱 썩어 문드러져 장차 붕괴되고 말 것입니다. 오늘날의 형세가 무엇이 이것과 다릅니까.”

 

대한민국의 위기적 상황과 이를 타개해 보려는 사람들이 느끼는 난감함을 이보다 더 정확하게 묘사할 수는 없다. 재산권, 자유권, 노동권, 여권, 복지(기본)권 등 특정한 권리만 상향하면 다른 곳이 크게 기울어지기에, 어디서부터 어떻게 손을 써야할지 알 수 없는 낡고 위태로운 집이 바로 대한민국이다.

 

부분적 개선 내지 특수한 자유와 권리의 상향이 전체적 퇴행, 고장으로 돌아오는 합성의 오류(fallacy of composition)가 극심하게 일어나는 1987체제다. 엔진인 민간의 경제활력은 꺼져가는데, 차체인 공공부문은 점점 비대해지고, 브레이크인 정의·공정·평등 가치도 점점 강화되어 1987체제에 의해 통할되는 대한민국은 고장난 자동차가 되었다.

 

체제란 사람이나 국가의 생각과 행동을 제약하고, 유인하고, 정형화하는 정치적으로 만들어진 공고한 구조 내지 틀이다. 체제=구조에 대한 고민은 인물(리더십)이나, 소소한 정책, 예산, 인사, 조직, 교육, 홍보·소통방식 등을 이리저리 바꿔보고, 시간과 인내(참고 기다림)까지 추가해도 간절한 변화와 개혁을 일으키는데 명백한 한계가 있다는 자각에서 시작된다. 다시 말해 반복되는 실망과 좌절, 깊은 성찰과 (사람, 제도, 국가, 정치의 속성과 한계를 꿰뚫는) 통찰이 만나야 비로소 체제=구조에 대한 고민이 시작된다.

 

그런데 체제=구조에 대한 고민 내지 통찰은 그리 새로운 것은 아니다. “인간은 천사가 아니며 천사에게 정부를 맡길 수는 없다”는 미국 4대 대통령(1809~1817년) 제임스 메디슨(1751~1836년)의 말과 “절대 권력은 절대 부패한다”는 영국 정치인 존 달버그 액턴(1834~1902년)의 말은 정치체제의 기본 상식이 되어 있다. 3권분립과 법치주의 등 민주(공화)체제는 이런 통찰 즉 인간(권력자)의 인식과 윤리의 한계에 대한 통찰을 딛고 서 있다.

 

서유럽, 미국, 일본 등 선진 정치와 현격히 다른 한국 특유의 정치부조리는 일찍부터 체제의 관점에서 분석되어 왔다.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의원과 당대표를 교체해 봤고, 몇 번씩이나 대통령 권력과 국회 권력(與野나 多數派)을 교체해 봤지만 한국 정치는 발전은 커녕, 오히려 퇴보하는 징후가 역력하기 때문이다.

 

본말이 전도된 채 파괴적인 경쟁과 갈등으로 일관하는 정치현상을 통탄하거나 고쳐보려고 몸부림치는 많은 정치인, 학자, 식자들은 일찍부터 권력구조(5년 단임 제왕적 대통령제)와 선거제도(결선투표없는 대통령 직선제와 국회의원 소선거구제 상대다수득표제)를 정치부조리의 핵심 원흉으로 지목해왔다.

 

하지만 여전히 후진 인물이 원흉이라고 얘기하는 사람도 적지 않다. 이들은 제각기 노동, 여성, 청년, 전문가, 기업인, 풀뿌리 정치인(지방의회 의원 출신) 등의 의석 비중을 늘리면 한국정치가 획기적으로 나아질 것이라고 말한다. 또한 민주진보파나 자유(보수)우파가 권력을 틀어쥐면 정치가 획기적으로 나아질 것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말하는 자들도 듣는 국민들도 믿지 않는 눈치지만, 선거가 다가오면 무한반복된다.

 

그도 그럴 것이 사람이 일으키는 모든 변화는 궁극적으로 사람의 생각과 행동의 변화에 달려있다. 체제라는 것도 사실 사람이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뛰어넘을 수 있는 벽이요, 벗어나려면 벗어날 수 있는 길이다. 그래서 사람(마음=생각)이 모든 것을 결정한다고 생각하기 쉽다.

 

하지만 좀체 바꾸기 힘든 사람(집단)의 속성, 심리, 습관은 있다. 탁월한 성군, 성자, 학자의 모범과 설득·교양에 뭇 사람이 감동·감화하여 만사가 풀린다면 경제학, 정치학, 사회학, 교육학, 심리학, 뇌과학 등 인간과 사회와 국가와 정치의 동역학을 연구하는 학문들이 발전할 수가 없다.

 

조선이 지배이념으로 내세운 주자학과 북한이 내세운 주체사상은 하나같이 사람(백성, 인민)의 마음, 사상, 의지 등을 강조하고, 통치자(왕, 양반사대부, 수령, 당원 등)의 인덕(仁德)을 중시했지만 처참한 실패국가로 전락했다. 기본적으로 사람의 생각과 행동을 제약하고, 유도하고, 정형화하는 자연적, 심리적, 정치적 구조를 직시하지도 이해하지도 못하였기 때문일 것이다.

 

사람의 생각과 행동 패턴 내지 결정 요인과 관련하여 동서고금에서 오랜 철학적, 과학적, 정치적 논쟁이 있었다. 중국의 경우 법가(法家)와 유가(儒家)의 오랜 논쟁이 있다. 법가의 유가에 대한 비판의 핵심은 보통사람이라도 바르게 생각하고 행동하게 만드는 제도를 고민하지 않고, 인·의·예·지(仁義禮智)를 다 갖춘 탁월한 성왕이 나와서 뭇 사람을 감동, 감화시켜 획기적인 변화를 기대하는 것은 연목구어(緣木求魚) 백년하청(百年河淸)이라는 것이다.

 

 

1987체제의 빛과 그늘을 극명하게 보여주는 노동권과 재산권의 관계는 헌법이나 법률 조항의 변화에 근거한 것이 아니다.

그런 성왕은 오백년이나 천년 만에 한명 나올까말까하고, 설사 나온다 하더라도 인간은 탁월한 윗 사람의 모범과 설득, 교양으로 생각과 행동을 바꾸는 존재가 아니기 때문이다.

 

어쨌거나 정치부조리에 대한 실망과 좌절은 너무나 많은 사람이 뼈에 사무치도록 절감하기에 체제=구조에 대한 회의와 고민은 보통 시민의 교양으로 되어 있다. 이는 정치체제와 정치리더십(인물)과 조직운영방식(지배운영구조 등)과 사상이념(보수와 진보, 자유주의, 공동체주의, 사회민주주의, 신자유주의) 등으로 세분화되어 연구, 고민, 토론되게 만든다.

 

하지만 정치부조리 못지않게 많은 변화·개혁의 실패와 좌절 경험을 안고있는 경제·고용(저성장, 저활력, 불평등, 양극화, 일자리) 부조리, 사회·문화 부조리, 교육·언론 부조리, 외교·안보 부조리, 경제적, 사회적, 환경적 지속가능성 위기 등에 대해서는 의외로 체제=구조의 관점에서 연구, 고민되지 않고 있다. 아마도 대중이 인물(리더십)과 예산, 교육 등의 한계를 꿰뚫어보기는 쉽지 않기 때문 일것이다.

 

체제·제도와 사람, 정치인과 시민적 지성·덕성의 문제 등이 구분되지 않으니 즉자적 처방만 난무한다. 온통 남 탓과 (전)정권 탓이다. 그 뒤를 재벌 탓, 부자 탓, 예산 탓, 복지 탓 등이 잇는다. 총선과 대선이 다가오면 남 탓과 정권 탓이 기승을 부리고, “종북좌익·빨갱이” 혹은 “친일매국·토착왜구” 척결, 노동강화, 여성친화, 청년주도, 규제완화=자유강화, 지방분권 등이 ‘만병통치약’인양 선전된다. 하지만 과거의 반복된 실패와 좌절에 대한 성찰과 반성은 거의 없다.

 

상식적으로 정권이 몇 번이나 바뀌어도, 또 역대 정권들이 저마다 노력을 한다고는 했지만 해결되기는 커녕 더 악화되는 부조리들은 이를 지탱하고 재생산하는 구조, 즉 체제의 관점에서 살펴야 한다. 그런데 정치 외의 분야에서 대중이 체제=구조에 대한 고민에 도달하려면 몇 백년의 경험이 더 필요할 지도 모른다. 이 글을 쓰는 것은 이런 대중 학습 내지 시행착오 기간을 조금이라도 단축하고 싶어서다.

 

헌법 조항이 아니라 정신문화와 정치지형

 

국가와 국민의 생각과 행동을 제약하는 공고한 구조로 말하면, 지리, 지형, 풍토, 수자원 등 자연환경(인력기술의 한계)과 중국, 일본에 인접한 반도라는 지정학적 조건(국가주권의 한계)이 맨 앞에 올 것이다.

 

그런데 체제는 정치적으로 만들어진 구조(틀)이다. 여기에는 문서화 된 헌법 및 법률과 그 해석(판례와 결정)도 있고, 국제조약(한미상호방위조약, 핵확산금지조약, 한일기본조약 등)과 국제정치경제체제(GATT, WTO, IMF체제와 중국의 경제적, 정치적 비상 등)도 있다.

 

토크빌이 국가와 사회의 운명을 가르는 요인이라고 말한 습속(習俗), 즉 정신문화는 공기나 연기처럼 실체가 뚜렷하지 않지만, 다시말해 문서화되어 있지는 않지만 헌법, 법률, 국제조약과 정치지형의 어머니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사상이념이 체계성을 띤 역사관, 세계관, 가치관의 총체라면, 정신문화는 사고방식, 생활양식, 집단기억(역사·현실인식)과 연결된 감정반응–한(恨), 트라우마, 콤플렉스 등—의 총체다.

 

1987체제는 1987년 10월 29일자로 개정되고, 1988년 2월25일자로 시행되어 2019년 현재까지 대한민국을 규율해 온 제10호 헌법에 의해 지지되는 정치체제다. 하지만 1987년 헌법이 1987체제를 낳은 것이 아니라, 1987체제가 1987년 헌법을 낳았다고 보아야 한다. 1987체제는 그 이전의 여러 체제들과 기계적, 화학적으로 결합, 융합되어 있다.

 

중국과 조선 등 동양사회가 공유하는 체제, 조선유교체제, 식민통치체제, 분단정전체제(1953체제), 국가주도 발전체제(1963체제, 유신체제, 전두환체제), 외환위기 이후의 경제체제(1997체제) 등이 그것이다. 자연환경과 지정학적조건, 그리고 국제조약과 국제정치경제체제와 정신문화는 정치체제라는 나무가 뿌리박은 토양이라고 할 수 있다.

 

1987체제의 유전자 내지 핵심 특성은 헌법 조문이 아니라, 지배적인 정신문화와 이를 뒷받침하는 정치지형, 즉 정치적 대립구도, 정치세력간 역관계, 유권자의 투표행태 등에 있다. 헌법 조문과 기본권(재산권, 자유권, 노동권 등)에 대한 헌법재판소의 결정, 대법원의 판례, 하위 법령과 정부의 유권해석, 정부조직과 예산 등은 1987체제의 유전자 내지 핵심가치가 외화된 것이다.

 

그러므로 1987체제의 특성은 1987년 헌법에서 새로이 삽입된 조항—대표적으로 대통령 직선제와 5년 단임제, 경제민주화 조항, 헌법재판소 관련 일부 조항 등—이나 삭제된 조항의 영향만 분석하면 알 수 있는 것이 아니다. 1987체제를 만든 역사·현실 인식을 포함한 정신문화와 정치지형이 오래 전부터 있었어도 사문화되었거나, 다르게 해석하던 조항을 새롭게 해석하기 때문이다.

 

예컨대 1987체제의 빛과 그늘을 극명하게 보여주는 노동권과 재산권의 관계는 헌법이나 법률 조항의 변화에 근거한 것이 아니다. 현행 헌법 제33조(노동권)의 핵심 권리의 하나인 근로자의 단체행동의 자유는 제헌헌법에도 명기되어 있었다.

 

•제헌헌법 제18조: 근로자의 단결, 단체교섭과 단체행동의 자유는 법률의 범위내에서 보장된다. 영리를 목적으로 하는 사기업에 있어서는 근로자는 법률의 정하는 바에 의하여 이익의 분배에 균점할 권리가 있다.

 

노동3권은 1948년7월17일 시행된 제헌헌법 제18조에도 있었다. 심지어 사기업에서 이익분배 균점권도 있었다. 노동3권은 1963년12월27일 시행된 헌법에도 보장되어 있었고(제29조), 1980년10월27일 시행된 5공화국 헌법에서도 마찬가지(제31조)였다. 그런데 이승만 시대에는 임금근로자 자체도 많지 않았고, 노조총연합단체인 대한노총은 권력의 한 축이기도 하였다.

 

•제29조 ①근로자는 근로조건의 향상을 위하여 자주적인 단결권·단체교섭권 및 단체행동권을 가진다.②공무원인 근로자는 법률로 인정된 자를 제외하고는 단결권·단체교섭권 및 단체행동권을 가질 수 없다.

 

•제31조 ①근로자는 근로조건의 향상을 위하여 자주적인 단결권·단체교섭권 및 단체행동권을 가진다. 다만, 단체행동권의 행사는 법률이 정하는 바에 의한다.(중략)

 

박정희, 전두환 시대에는 임금근로자는 많이 늘었어도 국가권력이 초법적 수단으로 노동 3권을 억누르고 있었기에 노동3권은 사문화되다시피 하였다. 그런데 1987년 이후 노조의 힘은 강해지고, 노동억압적인 가치, 제도, 정책도 약화되고, 사법부 판결도 점점 더 노동 친화, 기업 억압적으로 바뀌면서, 노동권과 재산권의 불균형이 점점 심화되었다.

 

근로자를 자본의 부당한 폭력, 즉 해고로부터 보호해야 한다는 정신문화는 근로기준법 제23조(해고 등의 제한)와 제24조(경영상 이유에 의한 해고의 제한)를 근로자에게 극히 유리하게 해석하면서 이 불균형을 더욱 심화시켰다. 특히 재산권 보호 개념(사업장 점거 금지 등)과 무기의 대등성 개념(필요시 대체인력 투입과 직장폐쇄 등)을 사상한 하위 법령과 법원 판례들이 누적되면서 노조에 의한 재산권과 경제활동 자유권의 침해도 극심해져왔다.

 

이것은 공공부문과 노조가 강한 기업의 고용안정 수준(해고 비용 등)과 임금 및 기업복지 수준이 웅변한다. 1인당 GDP를 기준으로 OECD 주요국과 비교하면 한국이 월등히 높다. 게다가 노동, 환경, 상법, 상속법 등 많은 법령에서 기업주에게 형사 책임을 묻는 조항도 점점 늘어나면서 기업의 투자와 고용 의욕을 더 강하게 억누르고 있다.

 

1987체제의 실체는 헌법재판소와 법원으로 하여금 헌법 및 법률을 다르게 해석하게 하고, 국회와 정부로 하여금 관련 법령(조항)을 양산하게 만든 정신문화, 사상이념, 정치지형을 보아야 보인다.

 

1987체제는 정치(정당), 지방자치, 사법(법원과 검찰), 경제, 고용, 교육, 보건의료, 복지, 연금 등 주요 분야의 법(해석과 결정 포함) 제도, 예산, 인사, 조직과 시민사회운동 등을 분석한 후 종합해야 그 다양한 얼굴과 동역학과 체제·제도의 고장 증상과 원인을 명료하게 알 수 있다. 엄청나게 방대한 작업이다. 하지만 이 글은 정치체제와 이를 관통하는 핵심가치, 이른바 체제 유전자에 국한된 분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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