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주광역시의 정율성 기념 사업은 시대착오다.

역사가 현재와 과거의 대화라면, 기념 사업을 하기 전에 먼저 현재를 보라.

김대호 승인 2023.08.24 18:23 의견 0

정율성 기념 사업 논란을 보니, "역사는 현재와 과거의 끊임없는 대화다"라는 말이 생각난다. E.H카가 1961년에 쓴 "역사란 무엇인가"에 나오는 유명한 말이다. 나는 1982년 대학 1학년 때 "해방전후사의 인식" "8억인과의 대화" "한국경제의 전개과정"을 읽을 때 쯤 읽었다. 당시 운동권 지하서클의 1학년 1학기 커리큘럼의 하나였다.

다른 책은 지적 쓰레기장이나 박물관으로 갔지만, "역사란 무엇인가"는 불멸의 고전 반열에 오르지 않았나 싶다. 책의 주장이나 통찰이 역사전쟁을 벌이는 나라에서는 계속 소환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지금도 누가 왜 이 책을 운동권 신입생의 필수 교양커리큘럼을 넣었는지 궁금하다. 돌아보니, 당시 운동권 커리큘럼에 국부론, 자유론, 법의정신, 미국의 민주주의 같은 책이 들어있었다면 대한민국과 86운동권의 정치, 이념, 문화 수준이 지금 보다는 훨씬 높아지지 않았을까 하는 느낌이 있다. 2023년 8월15일에 운동권 588명이 화석 좀비 주사 쓰레기 운동권 청산을 외칠 일도 없었을 것이다.

E.H카의 주장은 아마 수많은 역사가들도 얘기했을 것이다. 역사는 편집과 해석을 거친 기억의 연쇄(스토리)고, 기념물은 기억을 돕는 도구이기 때문이다. 당연히 먼저 주장한 사람도 있을 것이다. 검색해 보니 이탈리아의 역사가·철학자 베네데토 크로체(1866~1952)도 모든 역사는 현대사라고 했다고 한다. 역사란 본질적으로 현재의 눈을 통해서 그리고 현재의 문제들에 비추어 과거를 바라보는 것이기 때문이란다.

박희석 월간조선 기자 촬영


사설이 좀 길었는데, 광주의 정율성 기념사업 논란도 결국 '현재의 문제' '이 시대의 요구 내지 절체절명의 과제'(시대정신)를 떠 올려보면 무엇이 비상식(반동 반역)이고 무엇이 상식인지 알 수 있다.

1990년대와 2000년대 대략 20년 간은 중국이 개혁개방으로 세계 시장에 참여하여, 자유, 시장, 정보, 문화, 풍요가 중국에 들어가면 민주, 인권, 시장질서 등이 획기적으로 개선되리라는 믿음이 팽배하였다. 서로 출발선이나 체제가 달라도 많은 것이 수렴되리라 생각했다. 이는 한국, 미국, 일본, 유럽의 정치권과 지식사회에 보편적인 기대 내지 믿음이었다.

경제주의적 사고가 넘쳐나는 한국에서는 좀 더 오버하여, 중국에게 대한민국이 북한보다 월등히 중요한 우방국으로 여겨지리라는 믿음도 팽배했다. 그래서 한중 우호 증진과 공동 번영을 위해, 더 나아가 대한민국 주도의 한반도 평화 통일을 위해 한중 간의 불유케한 기억(원한)은 파묻고, 유쾌한 기억만 떠올리자는 것이 보수와 진보, 정치권과 경제계를 초월한 정신이었다. 박근혜 대통령이 천안문에 올라가고, 서울대에 시진핑 자료실이 만들어지고, 광주에 정율성 관련 기념물이 선 이유일 것이다.

조사해 보니 정율성 기념사업이 그 선봉이었다. 2005년 제1회 정율성 국제음악제가 개최되었다. 2009년 1월 광주광역시 남구 양림동에 '정율성로'가 고시되고, 2010년 11월 길 입구에 정율성 동상을 중국 광저우시로부터 기증을 받아 세웠다. 2014년 7월 윤장현 시장 취임후 시행한 '차이나 프렌들리' 사업의 일환으로 정율성 사적지 등 주변정비 사업과 정율성 한중음악제 개최 등이 추진되었다.

그런데 2008년 미국발 금융위기와 베이징 올림픽 이후, 특히 시진핑 집권 이후 중국이 어땠나? 미국 등 서방이 중국에게 시장을 열어주고, 투자를 하고, 기술을 이전하면서 중국에 기대한 것들; 자유롭고 공정한 경쟁, 지적 재산권 존중, 시장 양아치 내지 조폭적 행태 시정, 유투브, 페이스북 등 소통 플랫폼 허용, 티벳-신장위구르-북한 인권 개선(협조), 북핵 개발 견제, 남중국해 자유항행 존중, 대만, 한국, 필리핀, 베트남 등 주변국에 대한 중화제국주의적 태도 지양(호혜평등 국제관계) 등 개선된 것이 있나?? 오히려 기술 훔치기 행태는 더 기승을 부렸고, 넘쳐나는 경제력과 군사력을 뒷배로 공자학원 등을 앞세워 많은 나라의 정치, 언론, 교육, 문화에 부당한 개입을 시도했다.

8.15 광복절/건국절 대통령 경축사에서 "공산전체주의를 맹종하며 조작선동으로 여론을 왜곡하고 사회를 교란하는 반국가세력"의 중심에 누가 있을까? 종북주사파가 한 줌이라면 중국공산당의 정치적, 경제적, 정신문화적 좀비들과 중공당의 쓸모있는 바보들은 한 아름이 될 것이다. 반국가세력이 종북주사파 뿐이었다면, 공안합동수사본부를 만들어 이들을 발본색원한다며 부산을 떨었을 것이다. 하지만 대한민국에 대한 주된 위협은 국가보안법 위반, 간첩죄 등으로 단죄하기 어려운, 그람시의 진지전 성격의 공격이기 때문에 공안합동수사본부 같은 것을 만들지 않은 것이다.

그러므로 '이 시대의 요구 내지 절체절명의 과제'(시대정신)는 6.25는 잊고, 파로호는 지우고, 정율성 공원을 조성하고, 시진핑 자료실을 만들어 중국공산당으로 하여금 "띵호아"를 연발하게 하여, 경제적 이익을 챙기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정반대다. 중국의 정치적, 경제적, 정신문화적 침투, 관여, 세뇌 행위를 뿌리뽑는 것이다.

요컨대 민족(독립)이 아니라 대한민국의 헌법적 가치를 중심에 놓고, 여기에 복무하느냐 반하느냐가 역사 편집및 해석의 기준이다. 한마디로 대한민국이 기준이다. 따라서 항일의 공이 크더라도 친중 친북 반대한민국이면 기리면 안된다. 오히려 단죄해야 한다. 친일의 오점이 좀 있더라도 반공 반북 친대한민국이면 기려야 한다.

물론 남한과 북한이, 대한민국과 중화인민공화국이 자유, 민주, 공화, 인권, 시장 등 근대 문명의 핵심 가치에 합의하고, 서로 수렴되는 쪽으로 나아가면, 아니 나아갈 수만 있다면 화해, 협력, 관용, 포용, 공동번영의 정신으로 각국의 국가기념(혁명열사릉 등)묘역에 헌화도 하고, 불유쾌한 기억은 묻어두고, 유쾌한 기억만 꺼내서 서로 포옹할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이 41년 전에 읽은 책 "역사란 무엇인가"에서 얻은 통찰이다.

그런데 지금은 어떤 상황인가? 중국이 어디로 가고, 북한이 어디로 가고 있나? 또 대한민국이 어디로 가고 있나?


근대적 기업, 교육기관, 언론기관 등을 설립 운영하여 근대화에 앞장섰고, 무엇보다도 대한민국 건국의 일등공신이지만, 일제 말기 강압에 못이겨 학병 독려 캠페인을 했다는 이유로, 문재인정부와 민주당은 김성수를 친일로 몰아 인촌로를 고려대로로 바꾸는 만행을 저질렀다. 뿐만 아니라 친일파 작사자나 작곡자의 손길을 탓다면서 몇 십년간 불러오던 교가도 바꿨다. 개화-독립-건국-호국의 영웅인 이승만 대통령을 폄훼하는 영상물(백년전쟁)을 널리 유포시키고, 국립묘지에서 파묘해야 한다는 기가막힌 주장도 득세하는 상황이다. 광주전남을 주요한 기반으로 삼아온 정치세력이 역사 왜곡조작과 허물 침소봉대 등으로 대한민국의 정통성을 흔들고, 갉아먹는 것이 지금인 것이다.

강기정 시장은 역사적 인물 기념사업의 대전제인 역사적 맥락 내지 시대적 상황을 잊어 먹었다. 중국공산당에 대한 최소한의 경계심을 희석시키고, 대한민국의 헌법적 가치에 반하는 정율성 기념사업을 당장 걷어치워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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