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대 정부의 노동개혁과 민노총(민노총 제8탄)

-북한?북핵 문제와 노조?노동 문제, 같은 점과 다른 점-

사회디자인연구소 승인 2022.12.29 14:52 의견 0

북한•북핵 문제와 노조•노동 문제는 해결실패 원인이 비슷하다. 기본적으로 지피지기(知彼知己)에 게을렀다. 상대인 북한과 노조, 특히 민노총(간부•활동가•열성조합원)의 뿌리 깊은 피해의식(불안과 불신)과 이념성향을 바로 보지 못하였다. 이들은 남한 체제나 자유보수정부나 글로벌시장경제 체제를 이해•존중할 줄도 모르고, 공존•공생할 마음도 없고, 그저 상대를 약탈과 제압의 대상으로 간주했다. 어떤 정부는 상대(북한과 민노총)가 집요하게 요구한 민원(?) 몇 개를 들어주면 감읍(感泣)하여 자신의 선의(善意)에 화답할 것으로 생각했다. 순진하거나 낭만적이었다. 또 어떤 정부는 돈줄을 끊거나 돈을 더 주면 상대가 무릎을 꿇을 것으로 생각했다. 상대를 ‘경제동물’로 취급하는 등 얕본 것이다. 누가 봐도 국가와 미래를 위해 긴 호흡과 초당적 협력이 요구되는 사안임에도 불구하고, 역대 정부는 대체로 짧은 호흡과 당파적 이해관계에 따라 행동했다. 문재인정부는 아예 북한이나 민노총의 앞잡이나 친구가 되려 했다. 30년의 실패가 누적되면서 호미로 막을 수 있었던 것을 가래로도 못 막게 되었다. 1987년 이래 최강의 자유보수 정부였던 이명박•김영삼 정부가 해내지 못한 개혁을 최약체 윤석열 정부가 해내기는 어려울 것이다. 하지만 90도로 솟아 있는 높은 암벽도 자세히 보면 손잡을 곳과 발 디딜 곳이 있다. 이런 포인트를 잘 보고, 손발가락 힘과 팔다리 힘이 좋으면 능히 정복할 수 있다. 작은 힘으로도 골리앗을 쓰러뜨릴 수 있는 무기와 급소를 찾아야 한다.


1987년 헌정 체제를 관통하는 정신은 한마디로 대통령을 내 손으로 뽑아 독재를 물리치고, 빼앗긴 내 자유, 권리, 몫을 쟁취하는 것이었다. 자유, 권리, 책임, 의무 등 가치의 조화와 균형 개념이 없었기에, 체제에 내재한 온갖 불균형은 1990년대 초반부터 산업•노동현장과 부동산시장 등에서 불거져 나오기 시작했다. 하지만 여소야대 국회 하의 노태우 정부는 노사관계를 합리적으로 규율할 법제도 개혁은 엄두도 내지 못했다. 임금가이드라인 부활, (파업시)무노동 무임금 원칙, 노조의 경영권•인사권 침해 불가 등 수세적 조치만 고창하였다. 노동개혁은 3당 합당으로 과반 의석을 확보한 김영삼 정부(1993.2월 출범)에 의해 시동이 걸렸다. 초대 노동부장관 이인제는 개혁의 이름으로 ‘3자 개입금지’의 사문화, 무노동 무임금 원칙 유보 등 노조 요구를 적극적으로 수용하였다. 노동개혁의 기조는 ‘노사 간 자율교섭 보장’과 ‘국가의 중립성 견지’라고 공언했지만, 그해 7월 현대그룹 노조의 연대파업에 긴급조정권을 발동하면서 무색해졌다. 재계는 노동시장 유연화를 위해 파견•시간근로자 제도 법제화와 변형근로시간제 도입 등을 요구했다.

김영삼 정부는 1996년 4월 총선 직후 “신노사관계구상”을 발표하고, 12월 말 여당 단독으로 노동법 개정안을 통과시켰다. 대법원 판례로 굳어진 ‘경영상 이유에 의한 정리해고’ 요건을 법에 반영하고, 주 56시간 범위 안에서 근로시간을 자유롭게 조정할 수 있도록 하고, 파업 시 대체근로와 새로운 하도급 생산도 가능하게 하는 등 노동시장의 유연성과 공정성(노사 무기의 대등성) 제고에 성큼 다가섰다. 하지만, 상급 노동단체의 복수노조 허용 시기와 교원단결권 보장 시기는 몇 년 늦추었다. 이에 양대 노총은 즉각적인 연대파업을 벌이고, 두 야당(새정치국민회의와 자유민주연합)까지 합세하여, 결국 개정법안을 철회하는 이른바 ‘노동법 파동’이 일어났다. 1997년 1월 김영삼, 김대중, 김종필의 영수회담에서 개정법 재논의에 합의하고, 3월에 합의안을 통과시켰는데, ‘정리해고제 도입 2년 유예, 무노동·무임금 법 조항 삭제, 파업 시 신규 하도급(대체근로) 금지, 복수노조 도입’ 등이 골자였다. 이로써 노조가 정부를 이기는 선례를 만들어 외환위기의 먼 원인을 제공하고, 이후 노동개혁을 더욱 어렵게 만들었다. 하지만 그해 가을 IMF 구제금융 조건에 정리해고와 파견근로자 제도 도입 등이 포함되었고, 김대중 당선자의 주도로 1998년 2월 6일 ‘2.6사회협약’으로 입법화에 합의했다. 김대중 대통령은 외환위기 극복을 위해 기업•금융•공공•노동의 4대부문 개혁을 표방했는데, 노동개혁의 중심은 노동시장 유연화였다. 자서전에서 “노동시장 유연화와 노동기본권 확대는 동전의 양면”으로 “노동시장을 유연화하려면 노동자들의 권익도 확실하게 보장해 줘야” 해서, “교원노조와 민노총을 합법화하고 노조의 정치활동을 보장해 주었다”고 썼다. 노동시장 유연화는 자신이 주도적으로 철회시킨 정리해고 관련 조항을 원상회복시키는 것이었다. 하지만 노조를 힘센 노동의 약탈(지대추구) 수단으로 만들어 불평등, 양극화, 불공정의 공범으로 만든 노동조합법 개정안은 원상회복시키지 않았다. 취약근로자의 노동기본권을 보장하는 법제도는 기초생활보장제도가 전부였다. 실업급여 대상을 늘리고 요건을 완화했지만, 고용보험료도 제대로 못 내거나 근속기간이 짧은 취약근로자는 혜택을 볼 수 없었다. 정부 외에는 제어할 주체가 없는데, 전교조의 고삐를 풀어주면서 합법화 후유증은 길고도 잔혹했다.


최강 권력’ MB도 노동시장 유연성·공정성 손 못대
노무현 대통령은 변호사 시절(1987년 9월) 대우조선 노조 투쟁을 지원하는 과정에서 제3자 개입금지 위반으로 구속되는 등 노동운동에 매우 호의적이었다. 당선인 시절(2003년1월) KBS TV에 출연하여 “기업들이 정규직원에 대한 해고를 합리적으로 실시할 수 있도록 노동시장을 유연하게 만들겠다"라고 하였다. “비정규직에 대한 차별을 해소하기 위해서는 노동시장의 유연성, 즉 해고 요건을 완화하여 정규직에 대한 진입 문턱을 낮춰야 '비정규직 양산'이라는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라는 견해도 여러 번 피력하였다. 12대 국정과제의 하나인 ”사회통합적 노사관계 구축”의 주요 내용은 ‘필수공익사업 범위 외국수준으로 축소’, ‘노사분규 관련 법위반자 불구속수사’, ‘노동사건 손해배상 가압류 청구 남용방지’, ‘공공부문 구조조정 노동자 참여 제도화’ 등인데, 거의 노조의 요구를 수용한 것이다. 그런데 출범 2개월째부터 철도파업(4월), 화물연대 파업(5월 1차, 8월 2차), 전교조 NEIS 반대 연가 투쟁(5월 20일) 등이 벌어지는 것을 보면서 낭만적 생각을 바꾼 것처럼 보인다. 법과 원칙에 따른 대응을 강조했다. 노동부는 2003년 9월 <노사관계개혁방안>을 발표했는데, 그 목표로 ‘노사갈등으로 인한 사회적 비용의 최소화’ ‘유연하고 안정된 노동시장의 구현’ 등을 제시했다. 2006년 11월 비정규직 사용 기간(2년) 제한과 파견대상 업무를 포지티브 방식으로 명시한 ‘기간제 및 단시간 근로자 보호법’과 ‘파견근로자 보호법’을 입법화했다. 이로써 비정규직은 2년마다 잘리게 되었지만, 노동시장 이중구조는 완화되지 않았다. 1987년 체제에서 의석수나 득표차에서 최강의 권력인 이명박 대통령은 선거 과정에서 한국노총과 정책연대협약을 맺었다. 인수위 국정과제에 ”새로운 노사문화 창조 및 노동시장 법치화“를 명기하고, 노사갈등에 대해서는 당사자 해결원칙을 지키되, 불법행위에 대해서는 노사를 막론하고 법과 원칙을 엄격히 적용하며, 비정규직의 정규직 전환을 유도하기 위해 전환에 따른 인건비 증가액의 5%를 세액공제하는 방안을 추진키로 했다. 가장 자랑하는 성과는 2010년 타임오프제(근로시간 면제제도로 노조전임자에 대한 회사 측의 임금지급 원칙적 금지)와 복수노조 교섭창구 단일화 제도 입법화다. 그런데 김영삼 정부로부터 내려오던 미완의 개혁 과제, 즉 노동시장 유연성과 공정성 관련 법제도는 거의 손보지 않고, 대체로 주변적인 문제(노조 전임자및 복수노조 문제)에서 진을 뺐다. 노조•노동 문제를 법제도가 아니라, 행정 재량이나 경제적 유인으로 해결하려 했다고나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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