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보수의 역사적 서사는?

지난 150년과 35년의 서사 없이 자유보수의 사상적 자부심도 통일성도 없어

김대호 승인 2022.04.08 15:22 의견 0

3.9 대선 결과를 보고, 정권이 딛고 서 있는 역사적 서사의 위력과 중요성을 절감하게 되었습니다.


1987년 이후 역대 정부의 국정비전, 국정지표, 실천규범(국정운영 원리) 등을 연구해 본 적이 있습니다. 그 체계성으로 보면 이명박 정부가 제일이었습니다.
대한민국 역사를 건국-->산업화-->민주화-->선진화로 정리 했지요. 이런 인식 하에서 국가비전은 선진일류국가로, 실천규범은 창조적 실용주의, 국정목표는 신발전체제(질적성장, 법치확립, 다원주의, 고신뢰사회 등), 국정지표는 섬기는 정부, 활기찬시장경제, 능동적 복지, 인재대국, 성숙한 세계국가 등.


사실 선진화는 모든 것을 선진국 수준으로 끌어올리자는 얘기라서, 선진화를 가로막는 질곡이나 대립물을 정확하게 제시하지 않으면 대체로 듣기 좋은 말(중도실용, 품격, 통합, 화합, 협치, 신뢰, 질적성장, 선진통일 등) 대잔치로 끝나기 십상입니다.
항상 느끼지만 한국 특유의 모순부조리에 압박과 설움을 당해 보지 않은 사람들은 피와 눈물, 분노와 한숨을 수반하는 투쟁을 회피하거나 외면합니다. 그래서 mb정부나 박근혜정부의 성과를 높이 평가하는 사람은 많지 않을 겁니다. 물론 문재인정부와 비교하면 천백배 나은 정부이지만, 어쨌든 인구•연금•재정•지방•산업•교육 등 다방면에서 밀어닥치는 지속가능성 위기를 해소하기 위한 몸부림의 흔적은 별로 없습니다. (쓰고 보니 윤석열정부가 성공을 원한다면 이명박정부에 대한 평가, 반성 아니 성과, 한계, 오류를 천착해야 할 것 같습니다)


그럴듯한 서사(敍事=story)에 뿌리박지 않은 가치, 비전, 방법 혹은 국가비전, 국정목표, 국정과제, 국정운영원리(실천규범) 등은 대체로 좋은 말 대잔치로 끝납니다. 대립물(엣지)도 흐릿하니 엣지도 없습니다.


서사는 대통령과 정권의 소명의식, 자부심, 동지의식의 토대이자, 사상이념적 통일성의 근간 입니다. 서사가 공유되지 않으면 말과 행동이 어긋나고, 손발(위와 아래)도 안맞고, 앞뒤가 안맞게 되고, 분노도 자부심도 생기지 않습니다.


서사는 희생과 헌신(피와 눈물), 고난과 승리(환희)로 짜여진 감동적 스토리를 담고 있어야 합니다. 기독교의 사도신경과 조선로동당 규약(김일성 찬양)이 대표적입니다. 동학-독립운동-통일운동-노동운동(전태일)-민주화운동(5.18)-촛불시민혁명으로 이어지는 진보의 서사도 만만찮습니다. 그런데 보수는 서사가 약합니다. 아니 관심도 없는 것 같습니다.


개항 이후 150년의 서사와 1945년 이후 77년의 서사는 위정척사 vs 문명개화 등으로 읊을 수 있는데, 가장 중요한 것은 1987년 이후 35년의 서사 입니다. 이게 흐릿하거나 약하면 윤석열정부는 mb정부 시즌2에서 벗어나지 못합니다.


1987년 이후 35년은 민주화, 자유화, 세계화, 지식정보화(디지털화) 등이 진행되었지만, 동시에 ‘한강의 기적’을 만든 발전 동력(제도, 정신, 문화 등)의 소진 과정이었습니다. 단적으로 정치와 정부의 통합 조정 기능이 후퇴하면서 서로 조화와 균형을 이뤄야 할 가치(권리-권리, 권리-의무(부담), 이익-공헌(위험), 권한-책임)간 불균형이 점점 심해졌습니다. 로비력, 정보력, 투쟁력에 의한 국가(제도•규제•정책•예산)를 통한 합법적 약탈(지대추구)의 시대가 도래했습니다. 기득권(지대)의 성채가 곳곳에 들어서고, 양대정당, 공공부문, 규제산업, 면허직업, 조직노동, 부동산부자 등이 대표적인 기득권이 되었고, 경쟁의 본질은 성안 진입(성안 사람되기) 경쟁이었습니다. 성 자체를 허물려고 하는 움직임은 아주 미약했습니다.


결국 힘없는 약자(자영업자, 영세사업자 등)와 후세대에 부담을 떠넘기면서 인구•연금•재정•지방•산업•교육 등 다방면에서 지속가능성 위기가 심화되고 있습니다.
비유하자면 대한민국은 온 몸에서 암세포가 증식하는 말기암 환자입니다. 사상이념만 바꾸면 치유되는 병이 아니라, 온 몸의 균형이 깨져서 암이 모든 기관으로 퍼진 상태입니다. 달리 표현하면 대한민국은 고장난 자동차입니다. 운전수만 바꾸면 달릴 수 있는 자동차가 아닙니다.


아무튼 1987년 이후 35년을 설명하는 서사의 질이 윤석열정부 성공의 관건이 아닌가 합니다. 저처럼 지난 35년을 설명한다면 지금은 민주개혁 시대가 아니라 자유개혁 시대입니다. 자유(재산권, 통상, 동맹), 자립, (사적)자치, 개방 등이 핵심 가치일 수밖에 없습니다.


유효기간이 지났거나, 극히 왜곡된 국가시스템의 재설계, 정상화(합법적 제도적 불의 타파)와 민주•진보-자유•보수-공공부문이 합작한 기득권의 성채 허물기가 시대 정신입니다. 윤석열의 말과 행보와 인사를 보니 서사의 부재, 국정비전의 부실이 매우 우려스럽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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