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는 과대로 기억하고 공은 공대로 기릴 일

-전두환 전대통령의 명복을 빕니다-

김대호 승인 2021.11.24 17:34 의견 0

1986년 2월 말. 서울 서초경찰서. 1985년 11월13일 제기동 가투, 12월 10일(?) 사당동 가투 주동으로 구속되어 구치소로 넘어가기 직전, 부모님이 면회를 오셨다.
어머니는 아들이 어떤 처지인지 잘 모르고 올라 왔다가, 상황을 파악하고 어깨를 들썩이며 소리내어 우셨다. 아들 만나러 갈때면 무조건 먹을 것을 바리바리 싸가지고 오셨는데, 그 날도 먹을 것을 테이블에 펼쳐놓았는데 하나도 먹지 못했다. 어머니도 울고, 나도 울었다. 어머니 등을 어루만지면서 뜨거운 눈물을 흘렸다. (살면서 뜨거운 눈물을 흘린 적이 몇 번 안되는데, 그 중의 한번이다. 헤아려 보니 그 때 어머니는 만 46세 밖에 안됐다.)


그 날 모자 간에 얼싸안고 눈물을 흘리게 만든 전두환을 원망하고 또 원망했다. 이를 갈았다. 나는 눈물 글썽이며 울고있는 어머니를 위로하면서 "10년만 기다려 달라"고 몇 번이나 말했다.


이미 철이 들었을때니 10년 안에 혁명이 일어날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하지만 민주화운동이 반드시 승리하여, 10년 내 전두환이 처벌을 받고, 우리는 신원이 될 거라는 믿음은 있었다. 그리고 실제 그렇게 되었다.


그런데 군부독재타도를 외치며 민주화운동을 하고, 노동운동을 한 것은 더 나은 사회를 만들기 위함이었는데, 지금 대한민국은 참담하기 이를데 없다. 자살률과 출산률이 증거하고 있다. 청춘들은 기회와 희망의 사막지대에 내 던져졌다.


철이 들기 전에는 민주화를 우리가 피로써 쟁취했다고 생각했다. 지나고 보니 민주화는 광주의 피와 우리의 피 못지 않게, 또 한번의 유혈사태를 회피하려는 전두환, 노태우의 결단이 있었다. 1987년 대한민국은 1988년 8월의 미안마 , 1989년 6월의 중국(천안문)처럼 될 수도 있었다. 그랬다면 나는 십중팔구 윤상원처럼 싸우다 죽었을 것이고, 전두환, 노태우 역시 비명횡사 했을 것이고, 대한민국은 엉망진창이 되었을 것이다.


반독재민주화 투쟁도 칭송 받을 가치가 있지만, 평화적 정권교체를 위한 용단도 칭송 받을 가치가 있다. 눈을 들어 중동 중앙아시아 동남아 아프리카 중남미 동유럽 등의 민주화 과정을 보면 전두환의 용단은 결코 과소 평가 될 수 없다.


지나고 보니 우리가 쟁취한 것은 민주화도 아니었다. 산업화, 유사 민주화 다음에 온 것은 조선화였다.


정치와 사상과 운동의 본질을 치열하게 묻는다면, 사회주의는 선, 자본주의는 악으로 간주한 20세기 혁명투사들은 고개를 뻣뻣히 들 수가 없다. 마찬가지로 해방공간에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을 선, 미국과 대한민국을 악으로 간주하고 치열하게 투쟁한 해방통일전사들은 대한민국을 감히 능멸할 수가 없다. 마찬가지로 민주화운동을 선, 전두환 정권을 악으로 간주하고 치열하게 투쟁한 민주투사들은 압축적으로 퇴행하고 쇠락하는 대한민국의 현실 앞에 전두환을 함부로 욕할 수 없다.


전두환, 노태우는 그래도 공칠과삼이다. 문재인은 후하게 봐줘도 공일과구다. 전두환의 과는 과대로 기억하고, 공은 공대로 기릴 일이다. 문재인도 마찬가지다.


사과를 안하고 죽었다고 성토하는 사람 많이 본다. 일본에 대해서 지겹게 하던 얘기다. 유감(통석의 염) 표명 등 수십 번을 해도 또 하라는 것이 사과다. 집권 기간 중에 과오가 없을 수 없고, 그 과오에 대해 유감 표명 한번 안하는 정권은 없다. 전두환, 노태우도 그랬다.
하지만 일본과 전두환이 아무리 유감 표명을 해도 오로지 증오와 혐오와 폄하를 먹고 사는 비전부재 민주진보 패가 만족할 리가 없다. 그러니 역사의 심판에 맡기는 편이 낫다고 생각할만하다.


전두환 전대통령의 명복을 빈다. 우리는 당신의 공을 너무 몰랐다. 노태우 장례식장에는 조문을 못갔는데, 전두환 장례식장에는 조문을 갈까 한다. 뒤늦게 안 공을 기리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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