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유럽통합과 통화, 재정위기 (1) (정대영)

김대호(사회디자인연구소장) 승인 2013.06.24 19:45 의견 0

- 유럽통합의 뿌리-

  제3장 유럽통합과 통화, 재정위기     1. 유럽통합의 개요 -유럽통합의 뿌리- 역사학자은 아니지만 유럽과 중국의 역사를 비교해 보곤 한다. 개인적으로 볼 때 가장 큰 차이는, 유럽은 유럽 전체(최소한 대륙만이라도)를 통일한 왕조나 국가가 없었다는 것이고 중국은 통일과 분열이 반복되었다는 것이다. 또 중국의 통일은 내부 세력 뿐 아니라 금나라나 원나라 또는 청나라와 같이 외국의 지배에 의해서도 이루어져 왔다. 이에 비해 유럽은 외부 또는 내부에 의한 통일 시도는 있었지만 완전한 통일 국가에는 이르지 못했다. 로마제국도 남유럽과 라인강 서쪽까지만 점령하였고 지금의 독일 등 중동부 유럽에는 지배력을 미치지 못하였다. 8세기말 프랑크 왕국의 샤를마뉴(독일어 칼)에 의해 유럽 대륙의 일부 통일이 이루어져 서기 800년에 샤를마뉴가 황제에 즉위하였다. 프랑크 제국은 현재의 프랑스, 독일, 북부이태리, 베네룩스 3국, 오스트리아에 이르는 지역으로 유럽 대륙의 중심지이다. 지금도 많은 유럽 사람이 이 지역이 유럽의 핵심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그러나 프랑크 제국은 샤를마뉴 대제가 814년에 죽고 3년 후인 817년에 프랑스, 독일, 이태리의 기원이 되는 3개의 나라로 분리된다. 즉 프랑크 제국은 중서부 유럽의 제한된 지역에서 짧은 기간 존속한 통일 유럽 국가였다. 이후 유럽 통일의 시도는 있었지만 모두 성공하지 못하였다. 이민족에 의한 유럽 공격도 유럽 통일로 연결되지 못하였다. 10세기경 사라센 제국의 공격은 스페인과 지중해 섬지역의 점령에 그쳤다. 13세기 몽고의 공격도 운좋게() 징기스칸의 죽음으로 인해 폴란드에서 멈췄다. 14~15세기의 터어키도 발칸반도와 동유럽 일부만 점령하는데 그쳤다. 유럽 대륙은 크고 작은 수많은 나라로 분열된 상태가 지속되었다. 유럽 통일은 18세기말 19세기초 나폴레옹에 의해 다시 시도되었다. 나폴레옹은 로마제국의 시저를 꿈꾸며 1804년 프랑스의 황제에 즉위하여 무력에 의한 유럽 통일을 추진하였다. 그러나 1812년 러시아 침공의 실패와 1815년 워터루 전투의 패배로 나폴레옹의 희망은 한 여름 밤의 꿈으로 끝났다. 그리고 125년 후 독일의 히틀러에 의해 유럽 통일이 또 다시 시도되었다. 히틀러는 무력 뿐 아니라 인종말살정책까지 사용하여 유럽 통일을 밀어 부쳤으나 더 짧게 더 비참하게 막을 내렸다. 분열된 유럽은 각 세력 간의 영토와 권력에 대한 갈등으로 이어져 전쟁이 빈발할 수밖에 없었다. 왕위계승전쟁, 종교전쟁, 민족국가형성을 위한 전쟁 등 수많은 전쟁이 계속되었으며 어떤 전쟁은 전쟁이 하도 길어 전쟁의 이름이 100년 전쟁, 30년 전쟁이 되기도 하였다. 특히 20세기에 들어 일어난 제1차 세계대전과 제2차 세계대전은 이름과 같이 세계 여러 나라가 참전한 대형 전쟁으로 그 피해가 엄청났다. 제12차 세계대전 모두 전쟁의 발발과 주 전쟁터는 유럽 대륙이었다. 전쟁을 일으킨 독일 뿐 아니라 프랑스, 베네룩스 3국, 이태리, 오스트리아, 동유럽, 러시아 등 많은 유럽 국가에서 전쟁의 참화를 겪었다. 그리고 전쟁의 결과로 세계 정치, 경제의 주도권이 미국으로 넘어가게 되었다. 전쟁터가 된 국가는 큰 피해를 보지만 인접국은 큰 혜택을 얻는다. 제12차 세계대전의 유럽과 미국, 6.25전쟁의 한국과 일본이 좋은 사례이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유럽의 지식인, 정치인, 활동가들은 유럽 대륙이 더 이상 전쟁터가 되지 않도록 유럽 정치 역사의 틀을 바꾸려는 시도가 나타났다. 분열된 상태의 유럽은 세력의 균형 속에서만 불안정한 평화가 유지될 수 있는 체제였다. 장기간 유지가 어려운 세력 균형보다는 유럽 통합을 통해 유럽의 영구적인 평화체제를 구축하겠다는 것이다 그리고 유럽의 통일 방식은 역사적으로 실패한 무력에 의한 통일이 아니고 대화와 타협에 의한 통합이었다. 이러한 논의는 처음에는 이상론자들의 허황된 주장처럼 보였으나 여러 사람의 뜻이 모여지면서 점차 현실화되었다. 대화와 타협에 의해 통일된 거대한 국가를 만들어가는 유럽 통합은 인류 역사상 처음으로 이루어지는 새로운 실험이기도 하다. 현재의 유럽 통합은 공식적으로는 1948년 7월 프랑스 외무장관인 조르지 비도가 처음 제안했고 베네룩스 3국의 정치인들의 지지로 힘을 얻었다. 그리고 조르지 비도의 후임자인 로베르 슈망에 의해 유럽 통합의 실행방안(Schuman plan)이 제시되었다. 유럽 통합의 실질적 추진은 정치인도 학자도 아닌 기업인이며 활동가인 장 모네(Jean Monnet)에 의해 이루어졌다. 모네는 프랑스 코냑지방 출신으로 대학교육을 받지 않았고 영국과 미국을 대상으로 가업인 브랜디(코냑) 판매 일을 하였다. 제1차 세계대전시에는 영국과 프랑스의 경제협력업무도 수행하였으며 제2차 세계대전시에는 연합군의 군수물자지원업무를 수행하면서 영국과 미국에 많은 인적 네트워크를 가졌다. 유럽 통합의 일차적 난제는 제12차 세계대전의 원인이 되기도 하였던 자르(Saar) 지역(유럽의 석탄과 철강 주산지로 프랑스 독일 벨기에 룩셈브르그의 접경지역)의 지배권이었다. 모네는 독일과 프랑스의 석탄과 철강 생산은 초국가적 기구가 관리하는 방안으로 프랑스와 독일의 불신을 해결하자고 하였다. 즉 유럽 철강석탄공동체(ECSC)를 설립하여 유럽의 철강 석탄을 공동 관리하는 방안으로 ECSC의 설립과정은 쉽지 않았다. ECSC는 프랑스 독일 베네룩스 3국, 이태리 6개국의 참여하에 1951년 어렵게 설립되었으며 모네는 ECSC의 초대 대표로 각국의 이해관계를 적절히 조절하여 유럽 통합의 첫 작업을 성공적으로 수행하였다. 이어 유럽 통합은 프랑스의 드골대통령과 독일의 아네나워 수상의 전폭적인 지원 하에 질적인 발전을 하게 되었다. ECSC의 창립 멤버인 6개국에다 영세 중립국인 스위스와 오스트리아를 합하면 사를마뉴 대제의 프랑크 왕국과 거의 일치한다. ECSC 출범 이후에도 6개국은 유럽 통합의 핵심 역할을 하고 있으며 6개국 중에서도 프랑스와 독일이 유럽 통합을 실질적으로 이끌고 있다. 유럽에서 여러 회의에 참석해 보면 프랑스와 독일의 정치지도자와 국민이 화합하고 반복하지 않으면 유럽 통합은 계속 발전할 것이라는 유럽인의 믿음이 확고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유럽 통합의 원동력은 유럽의 분열을 막고 유럽이 다시 전쟁터가 되는 것을 방지하겠다는 유럽인의 의지다. 특히 프랑크 제국이라는 같은 뿌리에서 출발했지만 역사적으로 수많은 전쟁을 치뤘던 프랑스와 독일 사람이 전쟁의 씨앗이 되는 분열을 피하겠다는 의지이다.     - 송현경제연구소장 정대영- (성함이나 사진을 클릭하시면 송현경제연구소 싸이트로 이동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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